- 세종 신교의 탄생
비는 오지 않았지만, 모두가 우산을 들고 다니던 날이었다. 세상은 이미 젖어 있었고, 젖지 않은 건 믿음뿐이라는 말이 돌기 시작했다. 광화문 한복판, 동상 앞에는 처음 보는 천막이 쳐 있었다. 그 위에 붙은 현수막은 단순했다.
“세종은 다시 오셨다.”
하얀 천 위에 검은 글씨, 그 아래 작은 글씨로
“世宗神敎 – 첫 공적인 계시의 날”이라 적혀 있었다. 주변엔 누가 시작했는지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앉아 있었고, 그들은 하얀 셔츠와 검은 바지를 입은 채 같은 리듬의 문장을 반복하고 있었다.
“세종은 땀 흘리셨다. 세종은 슬퍼하셨다. 세종은 말씀하셨다.”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누군가 이들을 ‘세종 신교’라 불렀고, 곧 인터넷에 그 이름이 퍼졌다. 인터뷰에 나선 교단 대표라는 사람은 신학자가 아니라 국문과 출신의 30대 유튜버였다. 그는 카메라 앞에서 말했다. “세종대왕은 백성을 사랑하셨습니다. 백성은 지금 고통받고 있습니다. 그러니 세종은 우실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박수를 쳤다. 어떤 이는 눈물을 흘렸고, 어떤 이는 가슴을 쳤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에 이렇게 외쳤다. “다시, 한글을 구원합시다.”
곧바로 그들의 홈페이지가 개설되었다. 메인 화면에는 세종대왕 동상의 흑백 사진과 함께 붉은 글씨로 ‘이 땅의 말은 썩었다’는 문장이 번쩍이고 있었다. 게시판에는 각종 한글 어휘가 올라왔다. ‘갑질’, ‘불통’, ‘내로남불’, ‘자화자찬’, ‘망언’, ‘말실수’, ‘개소리’… 그리고 그 아래 “정화 기도문”이 달려 있었다.
“이 말들을 멈춰 주소서. 우리의 입을 닫고, 마음을 여소서.”
그들은 교회를 닮지 않았고, 절과도 닮지 않았다. 유니클로에서 산 듯한 셔츠를 입고, 카카오톡으로 공지를 돌리고, 구글 드라이브에 신앙문서를 저장하며,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을 통해 예배 아닌 예배를 드렸다. 이들은 자신들을 ‘신교’라 부르지 않고 ‘문명 회복자’라 칭했다. 모든 것이 농담 같았지만, 농담치고는 너무 진지했고, 진지함치고는 지나치게 가벼웠다. 그 중간 어디쯤에 있었다.
한글날을 앞두고 그들은 ‘세종찬가’를 제작했다. 멜로디는 누가 들어도 익숙한 7080 포크송풍이었지만, 가사는 기이하게 중독적이었다.
“가르치시고, 살리시고, 말씀하시니
백성은 비로소 사람이 되었다
그 말씀, 그 글, 그 사랑
우리가 지키리라, 우리가 지키리라…”
음원은 틱톡과 릴스에 번지고, 10대 사이에선 ‘세종 신교 밈’이 유행했다.
“말 조심해, 세종이 듣고 있어.”
“욕하면 땀 흘려.”
“세종어학당보다 센 신도들.”
그 말은 농담이었지만, 그 농담은 현실이 되어갔다.
문화체육관광부는 혼란을 우려해 홈페이지를 통해 ‘세종신교는 정부와 무관하며, 세종대왕의 역사적 의미를 왜곡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그러나 댓글창에는 “이 정부가 세종의 뜻을 가장 모욕했다”, “지금이야말로 훈민정음해례본을 다시 써야 할 때다” 같은 말들이 가득 달렸다. 언론은 뒤늦게 거리 두기에 나섰고, ‘세종 신교’라는 단어를 기사 제목에 넣는 걸 지양하기 시작했지만, 그때쯤 이미 세종은 민심 속에서 돌이 아닌 신이 되어 있었다.
오래된 국어교과서가 헌책방에서 동이 나고, 중고마켓에는 ‘세종대왕 전기’가 프리미엄 붙은 가격으로 올라왔다. 한 여중생은 ‘세종 신교 입문’을 위해 스스로 인터넷에서 훈민정음을 외워 유튜브로 인증했다. 사람들은 이걸 두고 말했다.
“이 시대의 신은, 말을 잃은 자들의 언어가 되어주는 자다.”
그날 밤, 동상 앞에서 노숙하던 어떤 노인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처음엔 글이 신이었지. 그다음엔 신이 글이 되었고. 지금은… 신이 침묵하고 있지.”
그를 지나치던 젊은 남자가 말했다.
“아니요, 신이 다시 말하고 있어요. 우리는 이제야 들을 준비가 된 거예요.”
그리고 그는 스마트폰으로 촬영 버튼을 눌렀다.
녹화 제목은 “세종의 복음 1장 1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