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토트로 여는 새 시대의 우아한 농담
2026 SS 디올 남성 컬렉션에서 가장 조용하게 그러나 가장 확실하게 새로운 시대를 예고한 건, 고요한 듯 강렬한 북토트 하나였다.
프랑수아즈 사강, 보들레르, 트루먼 커포티.
디올의 북토트는 단순한 텍스트가 아니라, 조나단이 설계한 첫 번째 서재이자 농담이다.
때로는 진심보다 잘 배치된 유머가 더 깊은 혁명을 만든다.
‘저렴해 보인다’는 한마디에 눌려 지나치기엔,
이 토트백엔 너무 많은 시대의 문이 걸려 있다.
“Bonjour Tristesse” – Françoise Sagan
슬픔이 인사하는 문장.
프랑수아즈 사강의 『슬픔이여 안녕』.
청춘과 허무, 질투와 자유에 관한 이야기.
마치 여름의 우울처럼 가볍고, 그래서 더 깊은 소설.
그 문장을 가방에 새겼다는 건 단순한 미학이 아니라
슬픔을 안고 걸어가는 태도에 가깝다.
그건 일종의 ‘감정 드레스코드’다.
“Les Fleurs du Mal” – Charles Baudelaire
‘악의 꽃’.
보들레르의 시집이자,
19세기 프랑스 상징주의의 출발점.
아름다움과 타락, 매혹과 고통이 뒤엉킨 세계.
그 제목을 푸른색 토트백에 수놓은 건,
로고보다 더 강한 존재감을 품은 선언처럼 느껴진다.
그것은 이름이 아닌, 문장의 로고다.
누군가를 읽어낸다는 건, 그를 입는 일보다 오래 남는다.
“Dior by Dior” – Christian Dior
자기 자신의 이름을 두 번 말하는 방식.
크리스찬 디올의 자서전 제목에서 따온 문장이다.
“디올이 말하는 디올.”
브랜드에 대한 자기 정체성의 선언.
하지만 리본을 닮은 자수 장식 덕에,
이 가방은 선언보다는 회고처럼 다가온다.
오히려 ‘디올이라는 기억’에 가까운.
“In Cold Blood” – Truman Capote
차가운 피.
트루먼 커포티의 논픽션 『인 콜드 블러드』에서 가져온 문장.
미국 중부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을 다룬 이 작품은
문학이 어디까지 진실을 껴안을 수 있는지 묻는 기록이었다.
이번 컬렉션에서 이 문장은 총알 자국을 형상화한
흰색 파열선과 함께 블랙 캔버스 위에 놓였다.
슬픔도 분노도 아닌, 침묵의 감도.
문학으로 시작한 첫 문장
2026 SS 남성복 컬렉션에서 등장한 북토트 시리즈는 그 자체로 한 편의 ‘개막 선언’이었다.
‘Bonjour tristesse(슬픔이여 안녕)’, ‘Les Fleurs du Mal(악의 꽃)’, ‘In Cold Blood(인 콜드 블러드)’…
각각의 가방은 문학적 레퍼런스이자 조나단의 디올 데뷔작 전체를 아우르는 철학적 배치였다.
그 안에는 낭만과 파괴, 슬픔과 유머, 신념과 허무가 동시적으로 감돌았다.
브랜드 로고를 문장으로 바꾸는 유머
기존의 북토트에서는 디올의 상징적 오블리크 로고나 플로럴 패턴이 중심이었다면, 이번엔 ‘책의 표지’가 전면을 대신한다.
이는 조나단의 디자인 언어가 단순히 텍스타일을 넘어서, 디올의 로고 그 자체를 유희의 대상으로 삼고 있음을 뜻한다.
특히 ‘DIOR BY DIOR’ 문장은, 자기 자신을 인용하는 셀프 포트레이트이자 디올 하우스에 대한 유쾌한 재귀 선언처럼 읽힌다.
“저렴해 보인다”는 감각의 충돌
한국 커뮤니티에서 이 가방을 보고 “에코백 같다”, “고급스러움이 없다”는 반응이 많았다.
하지만 이건 쇼피스의 본질을 오해한 반응이다.
이 북토트는 실용 가방이 아니라, 브랜드가 쇼를 통해 말하고 싶은 농담, 선언, 혹은 감성의 일러스트레이션이다.
그 재질과 프린트는 명확하게 ‘전시’를 위한 것이며, 일상 소비가 아닌 시적 소비를 전제한다.
시대를 여는 첫 토트백
이 쇼의 북토트는 조나단이 디올에 새롭게 가져온 ‘언어 중심 감도’를 가장 잘 드러내는 장치다.
정형화된 파리적 아름다움에 문학적 텍스트를 섞고, 전시적 소재를 던지는 방식은 과거 루이비통의 실험성이나, 과거 크레이그 그린의 인스톨레이션적 실루엣을 떠올리게 한다.
결국 브랜드가 새로운 시대를 연다는 건 이렇게 새로운 ‘언어의 형태’를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쇼피스는 누가 사는가
이 북토트는 가방이라기보다 조각에 가깝다.
그리고 이걸 사는 사람은 실용을 사는 게 아니라 ‘이 쇼가 내 안에 있다’는 감정을 사는 것이다.
한국에서 이 감각은 종종 ‘쓸모 없음’이나 ‘비효율’로 폄하되지만, 럭셔리의 가장 정제된 순간은 바로 그런 쓸모 없는 감각에서 탄생한다.
유머와 시의 경계에서, 이 북토트는 조나단이 디올에서 시작한 첫 번째 선언이었다.
이 가방은 한 권의 책처럼, 하나의 쇼처럼, 혹은 새로운 디올의 첫 장처럼 존재한다.
모든 쇼에는 농담이 있고, 모든 농담엔 진심이 있다.
그리고 그 진심은,
누군가 이 토트백을 손에 들고 조용히 걸어갈 때,
처음으로 진짜 이야기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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