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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속도로 기억되는 것들

장마와 러버부츠

by 루미 lumie

장마는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되는 게 아니다.

기압도, 예보도, 하늘의 색도

생각보다 늦게 말해준다.


하지만, 손끝에 닿는 공기의 밀도는

누구보다 먼저 다가온다.


그때 나는 러버부츠를 꺼낸다.



고무의 질감이 이토록 말이 없다는 걸

러버부츠를 신으며 알게 됐다.

물기를 튕겨내면서도,

어디에 부딪히지 않고 조용히 걷게 해주는 감촉.


나는 샤넬의 러버부츠를 가지고 있다.

숏과 롱, 두 가지.



숏 부츠는 묵직하다.

하지만 이상하게 자주 신게 된다.

발목에 걸리는 무게마저 리듬처럼 느껴진다.


비가 올 듯한 날,

비가 오다 마는 날,

진짜 비가 쏟아지는 날까지도.


그 부츠는

물기를 피하게 하는 신발이 아니라

젖어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구조처럼 느껴진다.



롱 부츠는 오래됐다.

신기 편하고, 안정감도 있다.

하지만 요즘은 자주 꺼내지 않는다.


예전에는 롱부츠가 멋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무게를 어쩐지

몸보다 마음이 먼저 느끼는 것 같다.


그렇다고 놓을 수는 없다.

그건 내가 더 이상 신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내가 신을 수 있는 방식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가죽 롱부츠는 불편해졌지만,

이 러버부츠는 여전히 감도를 허락한다.

시간이 흐르고, 구조만 남았을 때

이 부츠는 조용히 나를 정리해준다.



비가 오는 날,

러버부츠를 신는 건 실용을 위한 선택이 아니라

하루의 리듬을 다시 쓰는 일이다.


나는 여전히 부츠를 신고 걷는다.

물기를 피하지도,

억지로 밟지도 않는다.


부츠는

나와 땅 사이의 감도를 조율해주는

아주 조용한 구조물이다.



그렇게 비가 오고,

나는 젖지 않기 위해 걷는 것이 아니라

젖는 감정을 정돈하며 걷는다.


러버부츠는

그 감정이 머무는 속도를 지켜주는 신발이다.



걷는 속도로 기억되는 것들.

비와 부츠와, 나의 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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