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

river trail

by 박하린



추적추적 비가 온다.

끝도 없이 펼쳐진 들밭, 낮은 건물들, 휘날리는 성조기 사이로 차가 미끄러진다.

매일매일 다니다 보니 핸드폰을 꺼내 들지 않아도 어디로 가야 할지, 어디쯤 속도를 줄여야 하는지 알아내는 건 이제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 익숙한 풍경에 왠지 생경한 감정이 덧씌워진다. 집중하지 않으면 그냥 흩어지는 이 나라의 언어처럼, 나는 꼭 그냥 스쳐 머물지만 꼭 이곳에 들어맞는 퍼즐 같지는 않다.


이 생경함이 사실 그리 낯설지 않다는 생각을 하며 걷기 시작한다. 어린 시절, 나는 왠지 마음 둘 곳 없는 아이였다. 배가 고픈 것도 아니었고, 머물 집이 없는 것도 아니었지만 어디서든 내가 마지막 퍼즐 조각 같지는 않았다.

내 넘쳐나는 항아리에는 아무것도 가득 채워진 게 없었다. 어딘가 금이 가 무엇인가 새고 있었던 걸까. 모자란 것도 없으나 가득 찰랑이지도 않던 항아리, 그 항아리의 깨진 틈으로 결핍이 자랐다.


그런데 내게는 꼭 징검다리처럼 삶의 마디마디마다 다정이 있었다.

다정에 기대어 마음 둘 곳이 있었다. 채워지지 않았기에 그 틈에서 자라난 많은 것들 중 사람이 있었다.

건너고 나니 또 하나 나타나던, 하지만 영원히 머무를 수는 없던 그 많던 다정들.

지금에 와 뒤돌아보면 무수하고 아름다운 그 징검다리 덕분에 나는 계속 건널 수 있었다.


내가 걷는 길을 따라 함께 강물이 흐른다. 숲이 우거졌다가 꽃밭이 되었다가 들판이 된다.

과거 어느 시절에는 누가 꼭 내 항아리를 채워주길 바랐다. 새로운 다정이 내 틈을 메워주길, 끝없이 가득히 부어주길 갈망했다.

하지만 어른이 되는 건 그런 일이었다. 내가 내 항아리 금을 가릴 조각을 찾는 게 아니라 애초에 완벽히 맞는 조각이란 없음을 받아들이는 일.

오히려 틈에서 자라난 것들이 결국 항아리를 더 근사하게 만들어주었음을 받아들이게 되는 일이었다.


가벼움만큼 무거움이 희석된다. 내가 머무는 공기가 사뿐해진다. 강물마저 흐르는 걸, 매일 뜨는 해도 다른 시간에 뜬다는 생각을 한다.

손바닥 사이를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꼭 내 몸 사이사이 스치는 바람처럼 그렇게 세월과 인연이 흐른다. 안개가 흐릿해 먼 곳일수록 더 아련해진다.


자라나는 아들마저도 나를 깊게 스쳐 지가는 인연임을 이제는 안다. 시절의 마디마다 다른 향이 스친다. 시원하게 뻗은 길에 넘실거리는 건 그리움인가 아름다움인가.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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