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고 높은 곳

나는 여전히 밝고 높은 곳에 서있었다. 나만 서있었다.

by 저기 있잖아

엄마는 청담동의 한 피부과에 비치된 티백과 과자를 한 움큼 들고 왔다. 수많은 대기자 중에 단 한 사람도 손을 대지 않던 것이었다. 엄마는 평소 주전부리를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한껏 욕심을 챙겼다. 급기야는 젖은 티백을 새하얀 테이블에 그냥 올려두었다. 이걸 그냥 올려두면 어떡하냐고 눈치를 주자 엄마는 반항이라도 하듯 흥건한 티백을 맨손으로 집어서 휴지통으로 들고 갔다. 바닥에는 티백에서 떨어진 물방울 자국이 엄마의 자취를 따라 그대로 남았다.


그래도 옛날에는 안 저랬던 것 같은데. 나는 급기야 눈을 질끈 감고 엄마를 못 본척했다.


*


몇 년 전 엄마는 지방의 한 이름 모를 성형외과에서 안면 거상 수술을 했다. 안면 거상 수술은 엄마 또래 아줌마들 사이에서 대유행이었다. 그 성형외과를 택한 것은 아마 한 푼이라도 아껴보자는 심산이었을 것이다. 부푼 기대와는 달리 엄마의 양 눈썹 밑에는 칼로 그은 상처가 길게 남았다. 말은 안 했지만 엄마는 오랫동안 속앓이를 한 것 같았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 상처 때문에 대인기피증까지 생겼다고 했다.


오랜만에 집에 내려간 날, 엄마는 내게 결심했다는 듯 얼굴의 상처를 치료하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바로 흉터 치료 전문 병원을 알아보았다. 딸은 주기적으로 피부과에서 관리를 받는데 엄마를 오래 방치해둔 것만 같았다. 아니, 마음속 깊은 곳으로는 엄마의 고충을 알면서도 모른 척 엄마 탓을 한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러게 왜 그런 이름 모를 병원에 가서 얼굴을 망쳐.’ 하면서.


*


“어쩌죠... 레이저 치료를 여러 번 해봤자, 효과가 미미할 것 같아요.”


의사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그는 치료보다는 수술을 권하며 다른 병원을 소개해 주었다.


“그냥 레이저 치료 몇 번 해드리면, 저는 돈 벌고 좋죠. 근데 정말 효과가 없을 거예요.”


순식간에 엄마의 얼굴에 짙은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선생님. 그냥 치료로는 정말 안 돼요? 저 정말 멀리서 왔단 말이에요.”


엄마는 진료실에서 아이처럼 떼를 쓰기 시작했다. 지난번 안면 거상 수술 이후로 수술이라면 기겁을 하던 엄마였다.


“엄마, 효과가 미미하다잖아.”


책망하는 듯한 내 말에 엄마는 의사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갑자기 얼굴을 감싸 쥐고 울음을 터트렸다.


“이것 때문에 어제 설레서 잠도 못 잤는데 치료가 안되면 어떡해. 저 어떡해요, 선생님.”


진료실 가득 퍼진 엄마의 울음소리에 모두가 당황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나는 엄마를 어르고 달래어 황급히 병원을 빠져나왔다. 엄마의 속상함을 헤아리면서도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


병원 입구에서 엄마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아무 말 없이 불퉁하게 서있기만 했다. 밥이라도 먹겠냐고 묻자 엄마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됐다고 말했다. 그럼 다른 병원에서 예뻐지는 시술이라도 받자고 하자 엄마의 얼굴에 금세 화색이 돌았다. 엄마는 곧장 내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그럼 추우니까 빨리 지하로 가자.”


엄마는 지하철역을 가리켰다. 나는 엄마를 따라 눈보라 이는 거리를 걸었다. ‘이렇게 추운 날 택시 좀 타면 안 돼? 병원까지 얼마 되지도 않는 거리인데, 꼭 그렇게 궁상을 떨어야겠어?’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추우면 따뜻한 곳이 아닌 지하로 가는 게 엄마의 삶 같아서. 낡은 벽에 남은 빗자국처럼 내 마음도 조용히 얼룩졌다.


*


피부과에서 리프팅 시술을 받은 엄마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엄마는 수줍어하며 얼굴에 퍼지는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엄마와 함께 조명이 켜진 큰 거울을 바라보았다. 밝은 조명에 어느새 나이 든 엄마의 얼굴이 적나라하게 비쳤다. 얼굴 여기저기를 짚어보는 엄마의 두꺼운 손은 모든 게 도시적인 피부과에서 유난히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유명 피부과도 엄마의 지나가 버린 세월을 쉽게 돌려주진 못했다.


그 옆에는 고생이라고는 모르는 얼굴의 여자가 웃는 듯 마는듯한 표정으로 거울을 응시하고 있었다. 엄마의 젊음을 뻔뻔하게 먹고 자란 나였다. 젖은 티백을 아무 데나 두지 않는 우아함이나 결점 없는 피부를 유지하는 윤택함 모두 엄마의 지나간 시간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나는 엄마를 위해 큰마음 먹고 일 년 치 시술권을 결제했다. 비록 엄마의 얼굴에 상처는 사라지지 않겠지만 엄마가 적어도 일 년간은 아이처럼 웃을 수 있으리라.


*


“어휴, 찬 거 얼굴에 닿으면 시술 효과 떨어진다는데... 날이 이렇게 추워서 어떡하니. 너도 빨리 들어가.”


어느새 날이 어둑해졌다. 엄마는 역 앞에서 말없이 나를 꼭 안아주었다. 그러고는 크게 손을 흔들며 다시 지하로 사라져 갔다. 유난히 에스컬레이터가 긴 역이었다. 눈발이 날렸다. 코가 자꾸만 시큰거렸다. 엄마는 자꾸만 아래로, 아래로 작아져갔다.


나는 여전히 밝고 높은 곳에 서있었다. 나만 서있었다.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