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것을 견디는 게 남겨진 사람이 해야 할 일이었다.
[퇴사 인사드립니다]
소윤이 출근하여 자리에 앉았더니 퇴사 인사 메일이 와있었다. 같은 팀 개발자가 보낸 것이었다. 열어보니 늘 그렇듯 뻔한 이야기였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이제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새로운 시작을 해보려고 합니다.'같은. 퇴사 인사 메일은 소윤에게 묘한 불쾌감을 불러일으켰다. 이 회사를 떠난다는 설렘과 후련함이 한 글자 한 글자에서 여실히 느껴졌기 때문이다. 남아있는 사람 입장에서 그리 달가울 리 없었다. 소윤과도 몇 번 협업했던 개발자였지만 소윤은 답장하기 대신 뒤로 가기를 눌러 메일을 무시했다. 어제도 야근을 했는데 남의 새로운 출발 따위 축하해 줄 여력이 없었다.
*
"이번엔 진짜 퇴사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어."
오랜만에 동기들과 함께하는 점심식사에서 지은이 말했다. 소윤은 오늘따라 퇴사라는 단어가 가볍게 입에 오르내리는 게 못마땅했다. 지은은 오랜 꿈이었던 파티시에가 되고 싶다고 했다. 무려 8년이나 몸담은 직장을 뒤로하고. 평소 지은은 야무지고 똑 부러지는 성격이었기에 더 비현실적으로 들렸다.
"지은아, 농담 아니지? 올해 우리 회사 퇴사율 최저였대."
"그래. 경기 엄청 어려운 거 알잖아."
"파티시에는 회사 다니면서 취미로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동기들은 저마다 한 마디씩 보탰다. 모두 고개가 끄덕여지는 이야기였다. 이 불경기에 회사 밖으로 나갔다가는 정말 얼어 죽을지도 몰랐다.
"너희들은 잘 적응하는 것 같은데 난 이 회사에서 미래가 그려지지 않아. 행복하지도 않고. 늦게라도 꿈을 찾고 싶어. 지금 아니면 못할 것 같아."
지은은 결심을 굳힌 사람처럼 흔들림 없이 말했다. 동기들은 말이 없어졌다. 미래, 행복, 꿈. 회사에서 그런 걸 생각하고 있다니 지은 언니네 팀은 빡세지가 않구나. 소윤은 오랜만에 듣는 그 단어들이 다소 유치하게 느껴졌다. 소윤은 아무 말없이 입에 초밥을 구겨 넣었다. 향긋한 식초 냄새가 식욕을 돋웠지만, 음식이 쉽게 삼켜지지 않았다. 익숙하지 않은 단어들이 입 안에서 질척였다.
"소윤이는 어떻게 생각해?"
평소 소윤을 살갑게 챙기던 지은이 물었다. 기대감에 가득 찬 표정이었다. 소윤은 지은과 동기들의 얼굴을 차례로 살피며 입 안에 있던 초밥을 천천히 씹어 삼켰다.
"글쎄... 책임 있는 선택을 해야겠지."
소윤은 지은이 원하는 대답을 알고 있었지만 해주지 않았다. 해주기 싫었다.
*
"소윤 씨, 여기 장표 한 장만 더 추가해 줄 수 있어?"
누군가 점심을 먹고 이제 막 자리로 돌아온 소윤의 어깨를 꽉 붙들었다. 놀란 소윤은 들고 있던 양치컵을 놓칠 뻔했다. 뒤를 돌아보니 눈 밑은 시커멓고 눈은 새빨갛게 충혈된 팀장님이 서있었다. 짙은 화장으로도 피로를 가릴 수 없었다. 대표님 보고가 3시였다. 막바지 준비가 한창일 것이다. 덕분에 어제 소윤도 야근을 함께 했었다.
"팀장님, 점심은 드셨어요?"
"지금 밥이 문제겠어? 대표님 보고 끝나고 먹으면 돼."
빠르게 손사래 치는 팀장님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하루 만에 얼굴이 더 수척해진 것 같았다.
"소윤 씨, 내가 메신저로 보낸 파일 좀 열어봐."
팀장님의 재촉에 소윤은 다급한 손길로 파일을 열었다.
"응. 여기 이 부분, 다시 보니 논리가 좀 약한 것 같아서. 홈탭에서 이 모듈을 없애려고 하는 이유를 수치로 보완해 줘야 할 것 같아. 보고까지 얼마 안 남아서 빨리 좀 부탁할게."
팀장님은 양 미간을 모으고 간절한 표정을 했다. 소윤은 알겠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양치컵을 캐비닛에 도로 집어넣었다. 팀장님은 다시 허둥지둥 자리로 돌아갔다. 다른 팀원들에게도 마지막 SOS를 치고 있는 듯했다. 소윤은 모니터를 응시하는 팀장님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문득 아득하고 망연해졌다.
*
퇴근 후 소윤은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소파에 드러누웠다. 손에는 막 우편함에서 꺼내온 전기세 고지서가 들려있었다. 고지서는 한 번의 실수도 없이 재깍재깍 날아왔다. 그 성실함이 때로는 서글펐다. 고지서에는 26,000원이라는 숫자가 찍혀있었다. 저번 달보다는 덜 나왔다. 소윤은 그 사실에 작은 위안을 얻었다.
소윤은 무거운 몸을 겨우 일으켜 냉장고에서 시원한 맥주 한 캔을 꺼내왔다. 조용한 집안에 캔 뚜껑 따는 소리가 시원하게 울려 퍼지고 소윤은 강한 탄산감을 느끼며 맥주를 들이켰다. 그래, 이게 직장인의 행복이지. 별 거 있어. 사람들 사는 게 다 똑같지.
[내일은 카드 값이 빠져나가는 날이에요.]
그때 눈치도 없이 앱 알림이 왔다. 곧 전세 대출 이자도 빠져나갈 것이다. 월급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겠지. 게다가 소윤의 엄마는 관절염 때문에 고생 중이었다. 소윤이 나이 든 만큼 부모님의 몸 또한 여기저기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회사에서 실비 보험 지원을 해주지 않았더라면 소윤은 경제적으로 무척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그런데 지은은, 이 모든 현실적인 문제를 뒤로 한 채 퇴사한다고?
꿈을 찾기 위해?
소윤은 오랜만에 지은의 SNS에 접속해 보았다. 잠시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지은의 팔로워는 어느새 2천 명이 넘었다. 소윤은 지은의 피드를 빠른 속도로 스크롤했다. 케이크, 마카롱, 초콜릿 등 지은이 직접 만든 예쁘고 섬세한 디저트들의 사진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댓글창에는 디저트 판매 문의가 쇄도했다. 지은의 SNS는 시간을 성실하게 쌓아 올린 하나의 멋진 포트폴리오처럼 보였다.
시원하던 맥주가 갑자기 미지근하고 씁쓸하게 느껴졌다. 소윤은 실체 없는 배신감을 느꼈다. 소윤이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OTT 프로그램이나 보며 시간을 보낼 동안에 누군가는 또 다른 미래를 준비했다는 사실이 왠지 모르게 억울했다. 소윤은 맥주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맥주는 이미 맛을 잃어버렸다.
*
소윤은 서재로 들어와 노트북을 켜고 오랜만에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 접속했다.
꿈.
소윤에게도 꿈이 있었다. 방송 PD라는 꿈이었다. 아직도 소윤의 책장에는 대학시절 영상 콘테스트에 나가 받았던 상장과 트로피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회사에서의 8년은 긴 시간이었다. 소윤의 꿈은 천천히 빛이 바랬다. 소윤의 뾰족했던 개성은 어느새 둥글게 깎였다. 그러던 중 직장인들 사이에서 사이드 프로젝트 열풍이 불었다. 사이드 프로젝트로 인생을 바꾼 사람들의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소윤은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것을 떠올렸다. 영상 만들기였다. 소윤은 결국 유튜브를 개설하게 되었다. 소윤은 잠시나마 희망에 부풀었다.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결과는 처참했다. 소윤의 채널에는 아직 단 한 개의 영상도 업로드되지 않았다. 소윤은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의 무엇을 보여줘야 할 지도 알 수 없었다. 너무 평범했다. 사람들이 소윤의 영상을 볼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뭘 만들지?' 고민만 하다가 침대로 몸을 던지기 일쑤였다. 매번 퇴근 후 고단함을 핑계 삼았다. 하지만 알고 있었다. 진짜 문제는, 고민하기조차 싫었다는 것이다. 자신의 무능과 무력함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는 것이다.
*
"그동안 고마웠어."
지은이 퇴사했다. 모두가 무모하다고 이야기했지만 지은은 그 누구보다 단단해 보였다. 지은의 얼굴에는 후련한 미소가 가득했다. 나가서 꼭 성공하라는 둥 잘 살라는 둥 동기들의 덕담이 이어졌지만 소윤의 귀에는 그 말들이 진심으로 들리지 않았다. 소윤은 지은에게 아무 말도 건네지 않았다. 다만 새로운 세계로 떠나는 지은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떠나는 지은의 뒷모습을 보며 소윤은 더 이상 주변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자신과 너무 달라지지는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너무 멀어지지는 않았으면, 내가 예상할 수 있는 범위 내에 있어줬으면. 더 이상 누군가의 떠남으로 인해 마음이 출렁이지 않았으면.
지은을 배웅하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분명 지은이 떠난 것인데 소윤은 자신이 남겨졌다고 느꼈다. 사람들은 여전히 일을 하고, 커피를 마시고, 회의를 했다.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것을 견디는 게 남겨진 사람이 해야 할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