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주소 입력칸에 '청담동'이라는 글자가 또렷이 떠있었다.
주말을 앞둔 와인 모임은 끝날 줄을 몰랐다. 민경은 직장인 소모임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걸 즐겼다. 그림, 보드게임, 테니스 등 모임 때마다 민경의 세계도 점점 넓어졌다. 오늘은 와인이었다. 소믈리에 출신 모임장은 와인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늘어놓으며 다양한 와인을 맛보게 해 주었다. 민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지만 오르넬라이아라는 와인에 대해 절반도 이해할 수 없었다. 중요한 건 민경이 이 자리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민경은 평소라면 엄두도 못 낼 비싼 술을 마시고 적당히 취기까지 올라 기분이 좋았다.
모두가 떠들썩한 가운데 시계는 어느덧 10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자연스레 2차 이야기가 나왔다. 오늘 민경과 자주 이야기를 나누던 옆 자리의 희은이 물었다.
“민경 씨, 집이 어디예요? 2차 가시나요?”
“저 청담동이요. 2차 가야죠.“
희은은 생긋 웃더니 박수를 크게 치며 좋아했다. 이어서 희은은 반대편에 앉아있는 여자에게 집이 어디냐고 물었다.
“C시요. 2차는 좀...”
압구정에서 경기도의 C시까지는 적어도 두 시간은 걸릴 거리였다. 희은은 짧은 탄식과 함께 안타까운 눈빛을 했다.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인 희은은 곧 고개를 돌려 민경에게 다시 말을 걸어왔다. 결국 서울에 사는 사람들 위주로 2차 멤버가 꾸려질 터였다. 익숙한 일이었다. 민경은 얕은 승리감에 도취되었다. 씁쓸한 표정을 하고 있는 반대편 여자의 심정을 모르지 않았음에도.
*
대학 입학 첫 해, 민경은 B시에서 서울까지 지하철을 타고 통학했다. 무려 왕복 네 시간이 걸리는 거리였다. 한창 예뻐 보이고 싶던 새내기는 두꺼운 전공책을 들고도 하이힐을 포기할 수 없었다. 하루하루가 전쟁이었다. 어느 중간고사 기간, 만원 지하철을 타고 집에 온 민경은 현관에서 전공 책을 내던지며 울었다. 발이 아픈 것은 둘째치고 무엇보다 억울했다. 서울에 사는 친구들은 집에서 공부하고 있을 시간에 민경은 길바닥에 네 시간을 버려야 했기 때문이다. 놀라 뛰쳐나온 엄마에게 민경은 엄마는 왜 서울에 집이 없냐고 울며 소리쳤다. 엄마는 ‘그러면 서울로 대학을 가지 말지 그랬니.'라고 답할 뿐이었다.
민경은 다른 대학 남학생들과 미팅을 자주 했다. 다른 친구들과 달리 민경은 신데렐라처럼 밤 10시쯤 되면 막차 이야기를 꺼내야 했다. 그럴 때면 집이 어디냐는 질문이 꼭 돌아왔다.
‘집이 어디예요.’
이 질문은 민경에게 화살과도 같았다. 너무 자주 맞아 끝이 뭉툭하게 닳아 버린 화살. 민경은 B시라고 대답했을 때의 그들의 표정을 기억했다. 미묘한 거리감, 안타까움, 주변인을 보는 듯한 시선이 배어 있었다. 민경은 자신이 엄청난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그 자리에 끼어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민경은 누구보다 그 자리에 가볍게 자리하고 싶었다. 마치 집에 가기 전에 심심해서 들른 것처럼. 하지만 민경에게 가벼움은 허락되지 않았고 몸은 늘 무거웠다.
그들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통학 시간도 자주 물어왔다. 민경은 두 시간을 늘 한 시간 반 정도로 줄여서 말하고는 했다. 강남까지는 한 시간도 안 걸린다고 꼭 덧붙였다. 그래봤자 그들에게는 매한가지였을 것이다.
*
그 미묘하게 불편한 미팅 자리를 갖길 여러 번, 민경은 마침내 좋아하는 오빠를 만나게 됐다. 벚꽃이 만개한 어느 봄날, 민경은 오빠의 대학교 근처에서 데이트를 했다. 아직 사귀는 것은 아니지만 이제 막 피어난 간지러운 감정이 민경을 설레게 했다. 민경은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정확히는 오빠와 일찍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민경의 작은 욕심 덕에 지하철이 끊겼고 남은 것은 배차간격이 긴 마지막 광역버스뿐이었다. 엄격한 집안 분위기 때문에 외박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민경은 혼자 가겠다고 했지만 오빠는 기어코 민경의 손을 잡고 버스 정류장까지 데려다주었다.
B시로 향하는 광역버스 대기 시간이 20분이라고 떠있었다. 광역버스 대기줄도 길었다. 그 풍경에 민경은 괜히 작아졌다. 서울 중심부에 사는 오빠는 모를 현실이었다. 민경은 미안하다거나 고맙다는 말을 하기 싫어서 괜히 다른 이야기를 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이윽고 버스가 정류장에 가까워져 오자 오빠의 얼굴에 당황스러움이 번졌다. 버스 안에 사람들이 터질 것처럼 들어차있었다. 민경은 오빠의 표정을 살피고 괜히 얼굴이 달아올랐다. 이윽고 줄을 서 있던 사람들이 한숨을 쉬며 차례로 버스에 올랐다. 운전석 옆까지 사람이 가득 들어찼다. 민경은 두 눈을 질끈 감고 버스 계단 위에 올라섰다. 버스가 삑삑 소리를 내며 간신히 문을 닫았다. 민경은 버스 계단 위에 선 채로 사람들과 버스 문 사이에 간신히 끼어있었다. 오빠가 엷은 웃음을 한 채 손을 흔들었다. 민경은 못 본 척 고개를 숙였다.
‘네가 그렇게 서서 가니까 마음이 좋지 않네. 조심히 들어가.’
집에 가는 길에 메시지가 울렸다. 흔한 인사말이었겠지만 민경의 마음 한구석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밝은 도시가 점점 멀어지며 어두운 고속도로로 진입했다. 참아보려 했지만 끝끝내 민경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민경은 어릴 적 놀이터의 뺑뺑이를 떠올렸다. 있는 힘껏 중심을 붙잡고 있었지만 원심력을 못 이기고 밖으로 나가떨어지는 어린이가 된 기분이었다. 그날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민경은 하차하는 사람들을 위해 네 번 정도 버스에서 내렸다 다시 타야 했다. 보여주기 싫은 모습을 들켜버린 사람이 으레 그렇듯 민경은 그 후로 오빠를 보지 않았다.
동기들은 차차 밤 10시 이후에도 계속될 것 같은 모임에는 민경을 부르지 않았다. 그들에게 악의는 없었다. 어쩌면 민경을 배려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민경의 마음에는 억울함과 분노, 무력감이 계속 쌓여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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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인이 된 민경은 이를 악물고 서울에 집을 구하려 다녔다. 물론 쉽지 않았다. 서울은 지하에 살더라도 억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민경은 여러 번의 임장을 통해 서울이라는 벽이 얼마나 높은지 깨달았다. ‘집이 어디예요’는 단순히 집의 위치만 물어보는 질문이 아니었다. 그 사람의 자라온 환경이나 사회적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경제적 지표였다.
하지만 민경은 다시는 만원 버스 문 따위에 끼고 싶지 않았다. 집이 어디냐고 물었을 때 망설이고 싶지 않았다. 이왕이면 이름만 들어도 부자 냄새가 나는 동네에 살고 싶었다. 강남, 마포, 용산 같은. 민경은 무리해서 청담동에 집을 구했다. 햇빛도 잘 들지 않는 반지하 월세였다. 서울 외곽이면 충분히 지상에 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한 선택이었다. 민경은 드디어 선택이라는 것을 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민경은 늘 눅눅한 냄새와 싸워야 했다. 섬유유연제를 일반 세제보다 많이 썼다. 외출할 때면 옷에 코를 묻고 몇 번이나 냄새를 맡아보며 향수를 들이부었다. 그럼에도 깊은 곳에 진득하게 밴 냄새는 없어지지 않았다. 민경은 그 냄새를 자신만 알아채기를 간절히 바랐다. 계절과 상관없이 곰팡이는 꽃처럼 피어났다. 처음에는 락스를 붓고 칫솔로 문지르며 곰팡이를 없애기 위해 정성을 다했지만 나중에는 벽지 무늬 중 일부로 여기게 됐다. 한밤 중 벌레 기어가는 소리에 잠에서 깨기 일쑤였고 식사 시간에 올라오는 하수구 냄새 때문에 비위가 상했다. 민경은 나날이 말라갔다. 하지만 집 문을 열고 나섰을 때 민경이 딛고 서 있는 땅이 서울이라고 생각하면 발걸음이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었다. 봄이 아님에도 공기가 늘 달큼했다.
*
와인 모임 2차는 근처의 루프탑 바에서 계속되었다. 서울 타워와 한강을 비롯한 서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이었다. 높은 곳에서 본 서울은 더욱 밝게 빛났다. 민경은 서울의 야경을 두 눈에 담으며 와인을 홀짝였다. 저 멀리 한강대교를 분주히 오가는 차량의 불빛들이 보였다. 서울에 살지 않았다면 저 어딘가에서 밀려오는 허무함과 싸우며 광역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하고 있었을 것이다. 여섯 명 남짓 남게 되자 분위기는 느슨해지고 사람들은 더욱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민경은 멋진 직업을 가진 사람들과 친밀해질 수 있는 이 시간이 즐거웠다. 비로소 자신과 어울리는 자리를 찾은 것 같았다. 그때, 옆에 앉은 희은이 물었다.
“민경 씨, 청담동 산다고 하셨죠? 거기 살기 어때요? “
“좋죠… 쾌적하고 살기 좋아요. “
“그렇죠. 괜히 청담동이겠어요? 사실 저도 이사를 고민 중이거든요. 거기 오래 사셨어요?”
“뭐, 꽤 오래…”
민경은 여유로운 척하며 와인을 한 모금 마셨지만 손 끝이 살짝 떨리는 것을 느꼈다. B시에 살았던 때를 벗기기 위해 중, 고등학교 동창들과도 일절 연락을 않던 민경이었다. B시 친구들은 아직도 그들끼리 어울리며 그들만의 작은 세상에서 살고 있었다. 서른 살이 넘어서도 똑같은 얼굴들이 변함없이 SNS에서 우정을 자랑하는 것을 보면 부아가 치밀었다. 그들의 세계는 조금도 넓어지지 않았다.
청담동으로 이사한 후 며칠 뒤, 민경은 새로운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으며 ‘서울특별시’를 마음에 새겼다. 민경이 살아왔고 앞으로 살아갈 곳은 이곳뿐이라고 수없이 되뇌었다.
“민경 씨 청담동 사세요? 저는 거기 OO S 클래스 살아요. 더 반갑네요. “
민경의 반대편에 앉아 있던 지훈이 살갑게 말을 걸어왔다.
“반가워요. 저도 그 근처 살아요.”
“잘됐다. 이따 택시 같이 타고 가요."
민경은 말없이 빙긋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떨리는 손끝을 감추려고 괜히 와인잔을 빙빙 돌렸다. 지훈이 사는 OO S 클래스는 대로변에 멋진 위용을 자랑하며 우뚝 서있는 반면 민경의 반지하는 빌라가 밀집해 있는 지역을 한참 들어가야 찾을 수 있었다.
"청담동 오래 사셨으면 고등학교는 어디 나오셨어요? 저는 J고 나왔는데. “
지훈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동기 동창을 찾으며 친구 놀이나 하자는 뜻이었겠지만 민경에게는 일종의 테스트처럼 느껴졌다. 민경은 뒷목이 뻣뻣하게 굳는 것을 느꼈다. 손바닥에는 땀이 차오르고 입안은 바싹 말랐다. 나이 서른이 넘어 굳이 출신 고등학교까지 묻는 지훈이 짜증스럽기도 했다.
"저는 해외에서 고등학교 나왔어요."
자신도 모르게 거짓말을 뱉어버린 순간 민경은 아득함을 느꼈다. 민경은 비틀거리는 척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쉽지만 제가 좀 취한 것 같아서 먼저 일어나 볼게요.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모임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민경의 말에 당황한 반응을 보였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눈인사를 하고는 대화에 다시 집중하기 시작했다.
*
민경은 도망치듯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루프탑에서 1층까지 내려오는 시간은 채 1분도 걸리지 않았다. 민경은 정문을 나오자마자 건물 뒤편으로 돌아 들어갔다.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다급한 헛손질에 라이터의 불이 잘 켜지지 않았다. 겨우 담배에 불을 붙인 민경은 담배를 깊게 한 모금 빨아들였다.
"분위기 좋았는데 왜 고등학교 얘기를 하고 지랄이야."
허무함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10시만 되면 집에 가야 했던 그 시절과 지금이 크게 다를 바 없었다. 혼자 무리에서 튕겨져 나와 집으로 향해야 했다. 민경은 아무런 표정 없이 하이힐을 벗었다. 발바닥에 닿는 맨땅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민경은 꽉 조여있던 발의 아릿한 고통을 느끼며 제자리 걸음을 했다.
맨발로 한참 담배를 태우던 민경은 집에 가기 위해 택시앱을 열었다. 집 주소 입력칸에 '청담동'이라는 글자가 또렷이 떠있었다. 민경은 그 세글자를 한참 바라보다가 아주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