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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은 어떻게 아프리카를
통치했는가

by 강행구

식민 지배의 구조화와 ‘문명화’의 역설

19세기 후반, 아프리카는 유럽 열강의 탐욕스러운 야망 아래 급속히 재편되었다.
‘아프리카 분할(Scramble for Africa)’로 불리는 이 시기는 단순한 영토 정복이 아니라,

유럽 중심의 질서 속으로 아프리카 대륙 전체가 편입되는 거대한 구조 전환기였다.

유럽은 경제적 이권과 정치적 패권을 확보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아프리카에 뛰어들었고, 그 결과는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에 걸친 대대적인 재편이었다.


산업혁명 이후의 탐욕

식민 침탈의 근저에는 두 가지 요인이 있었다.
첫째는 산업혁명 이후의 경제 팽창.
둘째는 제국주의 경쟁의 격화였다.

산업혁명을 통해 엄청난 생산력과 자본을 축적한 유럽은, 이제 값싼 원자재 공급지,

새로운 상품 시장, 그리고 자본을 투자할 안정적인 공간을 필요로 했다.
아프리카는 이 세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이상적인 땅으로 인식되었고,

자연스레 열강의 표적이 되었다.


유럽의 세력 균형이 무너질 때

정치적 동기도 있었다.
1870년대 독일의 통일은 유럽의 세력 균형을 흔들었다.
보불전쟁(1870~1871)에서 패한 프랑스는 무너진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제국주의로 눈을 돌렸고, 영국은 부상하는 독일을 견제하기 위해 ‘방어적 제국주의’를 강화했다.
독일의 비스마르크는 처음엔 식민지에 회의적이었으나, 결국 유럽의 세력균형을 유지하려면

아프리카의 일부를 차지할 수밖에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문명화의 사명’이라는 위선

초기에는 탐험과 선교, 교역이 주된 접근 방식이었다.
하지만 곧 총과 행정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열강들은 자신들의 침략을 문명화의 사명(Mission civilisatrice)이라 포장했다.

그들은 “진보된 가치와 기독교 윤리를 전파한다”라고 주장했지만,
실상은 자원 수탈과 영토 확장을 정당화하기 위한 명분일 뿐이었다.
‘문명’이라는 말은 총구 뒤에서 울려 퍼지는 허울 좋은 선전이었다.


베를린 회의 ― 아프리카의 운명이 결정된 자리

1884~1885년 열린 베를린 회의는 아프리카의 운명을 외부의 손으로 재단한 결정적 사건이었다.
유럽 열강은 실효적 점유(effective occupation)”라는 원칙을 세워,

실제로 통치하는 지역만 영유권을 인정하기로 합의했다.
이 회의에는 아프리카 대표가 단 한 명도 초대되지 않았다.

이에 따라, 불과 30년 만에 아프리카 대륙의 90% 이상이 유럽의 깃발 아래 들어갔다.
영국은 이집트에서 남아프리카까지 이어지는 ‘종단 정책’,
프랑스는 서부에서 동부로 뻗는 ‘횡단 전략’을 추진했다.


벨기에는 콩고를 국왕 레오폴드 2세의

‘사유지’로 만들어 악명 높은 수탈을 자행했고,
독일은 동아프리카와 서남아프리카에서 잔혹한 탄압과 학살을 벌였다.
포르투갈과 이탈리아도 각각 앙골라, 모잠비크, 에리트레아 등지로 세력을 넓혔다.








식민 통치의 두 얼굴

유럽 열강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아프리카를 지배했다.
하지만 공통된 목표는 하나였다.
아프리카를 유럽 중심의 질서로 편입시키는 것.

프랑스는 ‘직접 통치(Direct Rule)’를 채택했다.
프랑스 본국의 법과 행정, 언어, 문화를 식민지에 그대로 이식하는 방식이었다.
소수의 엘리트에게만 시민권이 주어졌고, 대부분의 아프리카인은
자신의 문화를 억압당한 채 ‘프랑스식 인간’이 되기를 강요받았다.


반면, 영국은 ‘간접 통치(Indirect Rule)’를 택했다.
토착 지도자들을 하위 행정조직으로 활용했지만,
그 과정에서 전통 질서가 왜곡되고 권력의 균형이 깨졌다.
권력이 없던 인물이 식민 당국의 ‘지도자’로 임명되기도 했고,

이는 지역 사회 내 신뢰의 붕괴로 이어졌다.


벨기에는 그중에서도 가장 잔혹했다.
‘벨기에령 콩고’에서는 고무 채취량이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주민의 손을 자르거나 처형하는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이른바 “레오폴드 2세의 개인 왕국”은 근대 역사상 가장 잔인한 경제 수탈의 현장이었다.

독일의 식민 통치 기간은 짧았지만, 그 폭력성은 오래 남았다.
1904~1908년 나미비아에서 벌어진 헤레로족과 나마족 학살은
20세기 최초의 조직적 인종학살로 기록된다.
사막으로 내몰린 수만 명이 식수와 식량을 차단당해 죽임을 당했고,
생존자들은 강제수용소에 갇혀 목숨을 잃었다.


국경선 하나가 만든 비극

식민주의의 폭력은 단지 생명을 앗아간 데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정치 구조 자체를 바꿔버렸다.

유럽인들이 자의적으로 그은 국경선은 수많은 민족과 언어, 종교 공동체를 인위적으로 묶어버렸다.
이로 인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민족 갈등과 국경 분쟁의 씨앗이 뿌려졌다.

식민 통치는 단순한 ‘지배’가 아니라, 아프리카 사회 전반을 재구성한 역사적 공정(工程)이었다.
그리고 그 후유증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독립 이후에도 남은 그림자

20세기 중반, 공식적인 식민 통치는 차례로 해체되었지만
그 유산은 여전히 아프리카 사회 곳곳에 깊이 남아 있다.

식민 통치가 만들어낸 왜곡된 권력 구조는
독립 이후에도 엘리트 중심의 정치, 군부 개입, 빈곤과 불평등으로 이어졌다.
형식적 독립은 이루어졌지만, 정신적·경제적 종속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아프리카의 오늘을 이해하려면, 그들의 현재 속에 여전히 흐르는 제국의 유령을 직시해야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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