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 위의 외교가 아닌, 생사의 갈림길에서 배우는 진짜 외교란 무엇인가
2011년 12월, 평온한 일상을 깨는 외교부 본부의 긴급 전화가 걸려왔다.
“우리 국민이 아프리카 기니로 사업 차 출장 중 피랍됐습니다.”
신변도, 위치도 파악되지 않은 채, 모든 것은 불확실했다.
정식 출장은 승인되지 않았지만, 나는 주저하지 않았다.
생명의 위협 앞에서는 절차보다 ‘속도’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날 밤, 나는 기니행 비행기를 예약했다.
기니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현지 명예영사와 함께 곧장 경찰청장실로 향했다.
숨을 가다듬고 말문을 열었다.
“우리 국민이 피랍되었습니다. 행방조차 파악되지 않고 있습니다.
시간이 지체될수록 위험은 커집니다. 신속한 협조를 요청드립니다.”
그 말은 단순한 요청이 아니었다. 절박한 외침이자, 인간적인 호소였다.
하지만 주재국의 태도는 신중했고, 외국인 사건에 대한 관심은 제한적이었다.
나는 외교관이 아닌 ‘한 사람’으로, 간절하게 설득해야 했다.
협상은 극도의 긴장 속에서 이어졌다.
피랍단체는 우리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거액의 돈을 요구했고,
국내에 남은 가족은 그 금액을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때로는 피랍자의 고통스러운 신음이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고,
그것은 단순한 협박을 넘어 절박한 공포로 다가왔다.
나는 매 순간이 중대한 선택의 기로임을 실감했다.
단 하나의 결정이 한 사람의 생명을 좌우할 수 있다는 사실에 심장이 조여 왔다.
어느 선까지 타협할 수 있는가?
주재국의 협조는 어디까지 이끌어낼 수 있는가?
혹시라도 잘못되면 어떻게 되는가?
매뉴얼은 없었다.
머릿속은 냉정해야 했고, 마음은 끊임없이 흔들렸다.
그 불안은 밤잠을 앗아갔고, 책임은 오롯이 나의 몫이었다.
외교라는 단어는 종종 차가운 회담 테이블이나 격식 있는 만찬장의 이미지로 떠오르곤 한다.
그러나 내가 경험한 외교는 그와는 전혀 달랐다.
피랍 현장을 오가며 직접 협상을 벌이고,
총부리를 앞에 두고도 국민의 안전을 외쳤던 순간들 속에서
나는 ‘진짜 외교’의 의미를 절감했다.
그것은 책상 위 보고서가 아니라,
흙먼지를 맞으며 현장에서 발로 뛰는 실천이었다.
나는 이른 아침부터 경찰청을 드나들며 수사팀과 함께 사건의 실마리를 좇고,
오후에는 현지 명예영사와 함께 코나크리의 어두운 뒷골목을 누볐다.
실종된 국민이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게스트하우스를 수소문하고,
우리 국민이 방문했다는 식당의 주인에게 피랍자의 사진을 내밀며 간절하게 물었다.
“이 사람, 기억나십니까?
우리 국민입니다. 그의 생명이 걸린 문제입니다.”
그러던 중 피랍단체가 전화 외에도 한국에 있는 가족에게 몸값을 요구하는 이메일을
보내왔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그 이메일의 IP 주소를 추적해 피랍단체의 위치를 파악하려 했다.
그러나 협조를 요청한 기니 경찰청의 수사팀은 ‘IP’가 무엇인지조차 몰랐다.
“IP? 그게 뭔가요?”
그 말을 들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국제 납치 사건의 최전선에서 디지털 수사 능력이 이토록 취약하다는 사실은 충격이었다.
절망스러운 상황에서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우리 국민의 생명이 달려 있었기에,
한국의 수사 당국과 외교부까지 총동원해 다양한 경로를 모색했다.
결국 몇 번의 시도 끝에 송신자의 접속 위치가 기니 수도 코나크리 근교임을 특정할 수 있었다.
단서를 찾기 위한 노력은 계속되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확보한 우리 국민의 노트북에는 범죄조직과 주고받은
고철 수입 계약서 초안이 저장되어 있었다.
그 안에는 의심스러운 사업체 ‘로열 패밀리 마이닝(Royal Family Mining)’과 함께
은행 계좌 정보가 포함되어 있었다.
같은 날 오후, 수사팀은 우리 국민이 기니에 입국한 후,
사용한 전화번호에서 용의자의 단서를 확보했다고 전했다.
수사팀은 용의자가 기니 내 나이지리아인 집단 밀집 지역에서 전화번호가 사용되었다고 전했다.
IP 사용 지역과 동일한 지역이었다.
나이지리아 범죄단체의 소행임을 추정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정황에 따라, 우리는 수사의 협조를 구하기 위해
기니에 있는 나이지리아 대사관을 찾았다.
범죄 조직이 나이지리아계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나이지리아 대사에게 긴박한 상황을 설명했다.
“대사님, 우리 국민이 납치되었습니다. 나이지리아 커뮤니티의 협력이 절실합니다.”
그 모든 순간 속에서 나는 다시금 깨달았다.
외교란 단순히 국가 간의 협상이 아니라, 위기에 처한 국민을 위한 결단이다.
다시말해 외교란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흥정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불가능"을 "협상의 언어"로 바꾸는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피랍의 현장에서,
보고서나 행사장에서는 배울 수 없는 진짜 외교의 본질을 체험했다.
현장에서, 절박함 속에서, 외교는 완성된다.
다행히 우리국민은 무사히 구조되었고,
나이지리아인으로 구성된 피랍단체는 일망타진되었다.
그 모든 과정을 함께했던 현지 명예영사의 인맥과 헌신은 눈물겹도록 감동을 주었다.
그는 단순한 협력자를 넘어,
구조 작전의 ‘생명선’이라 할 수 있었다.
그의 공로를 본부에 보고하고,
정중히 국내로 초청해 우리 정부의 감사의 뜻을 전했다.
그리고 남은 질문
이 사건은 나에게 잊을 수 없는 질문을 남겼다.
“당신이 목숨 걸고 지켜야 할 외교의 가치는 무엇인가?”
나는 그 답을 직무가 아닌, 사람에게서 찾았다.
외국에서 위기에 처한 국민에게 외교관은 마지막 희망이다.
그리고 그 희망이 되어야 했던 하루하루는 내 인생을 바꿨다.
그날 이후,
나는 외교를
‘타국과의 협상’이 아니라,
‘국민을 향한 결단’으로 다시 정의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