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작업했던 꽃꽂이 작품 사진들을 들춰 본다. 빛바랜 사진 속에는 당시의 분위기와 향기, 그리고 꽃을 매만지던 나의 치열했던 손길이 그대로 박제되어 있다. 그 사진들이 오늘, 멈춰있던 나의 글을 다시 움직이게 했다. 수많은 꽃이 저마다의 자태를 뽐내고 있지만, 내 시선이 오래 머문 곳은 화려한 장미나 백합이 아니었다. 그들의 발치에서, 혹은 그들의 어깨너머에서 희미한 안개처럼, 하얀 눈꽃처럼 피어올라 전체의 균형을 붙들고 있던 안개꽃이었다.
꽃꽂이를 하다 보면 가끔 2%의 부족함에 손을 멈추게 되는 순간이 있다. 주연이 되는 꽃들을 정성껏 배치하고 구도를 잡았음에도, 어딘가 허전하고 날 선 느낌이 지워지지 않을 때다. 그때 안개꽃 한 줄기를 집어 그 꽃들의 사이사이에 가만히 밀어 넣으면, 마법처럼 작품은 비로소 안정을 찾는다. 제 존재를 강하게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주연들의 날카로운 모서리를 부드럽게 감싸 안는 안개꽃의 기질. 그것은 전체를 완성하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배경으로 내어주는 헌신적인 조연의 모습이다.
물론 안개꽃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다. 커다란 항아리에 안개꽃만을 한 아름 꽂아두면, 마치 지상으로 내려온 은하수를 마주하는 듯한 몽환적인 감동을 준다. 홀로 있을 때도 그토록 눈부신 존재가 다른 꽃들과 섞일 때는 왜 그토록 철저히 자신을 낮추어 베이스가 되기를 자처하는 것일까. 안개꽃을 매만지던 그 시절의 나는 알지 못했다. 내가 그 작은 꽃송이들 사이를 메우며 작품의 완성을 기뻐할 때, 안개꽃은 스스로를 지워 타인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제 삶의 중턱을 넘어 지난날을 회고해 보니, 우리네 삶 또한 한 편의 거대한 꽃꽂이 작품과 다르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누구나 인생이라는 무대 위에서 화려한 주인공이 되기를 꿈꾼다.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장미가 되어 세상의 찬사를 한 몸에 받길 원한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내 삶의 가장 찬란했던 순간들을 완성해 준 것은, 내가 주인공이라 믿었던 그 시간의 뒤편에서 묵묵히 여백을 채워주던 수많은 '안개꽃들'이었다. 나의 성취 뒤에는 이름 없이 헌신했던 가족의 인내가 있었고, 나의 슬픔 곁에는 말없이 공간을 지켜주던 친구의 침묵이 있었다.
나 또한 누군가의 삶에서 그런 안개꽃이었던 적이 있었을까. 나의 뾰족한 고집이 타인에게 상처를 줄 때, 누군가는 안개꽃처럼 그 사이를 메우며 나를 다독여 주었을 것이다. 반대로 내가 누군가의 삶에서 2% 부족한 구석을 채워주기 위해 기꺼이 배경이 되어주었던 시간들도 있었을 것이다. 당시에는 그것이 내가 손해 보는 일이라 생각하거나 주목받지 못함에 서운해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안다. 누군가를 빛나게 하기 위해 나를 베이스로 깔아주는 일은, 단순히 조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전체의 조화를 책임지는 가장 높은 차원의 예술임을 말이다.
안개꽃은 화려한 꽃잎이 다 떨어진 뒤에도 그 형태를 잃지 않고 드라이플라워로 남아 곁을 지킨다. 생의 생기가 빠져나간 자리에도 여전히 남아 "괜찮아, 내가 여기 있을게"라고 속삭이는 듯하다. 모든 화려함이 지나간 뒤 비로소 보이는 진실, 그것이 안개꽃이 내게 남긴 회고의 말이다.
주인공이 아니어도 좋다. 아니, 오히려 누군가의 삶을 완성해 주는 그 숭고한 여백으로 남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안개꽃이 가르쳐준 지혜는 바로 이것이다. 나를 지워 타인을 빛나게 할 때, 나라는 존재는 비로소 지워지지 않는 영원한 풍경이 된다는 것. 빛바랜 사진 속 안개꽃이 오늘 내게 조용히 묻는다. 너는 지금 누구의 여백을 채우는 꽃으로 살아가고 있느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