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나를 불편하게 하는 말들

인간의 중력

by abecekonyv

나를 불편하게 하는 단어들이 있다. 하나의 예로 '형이상학形而上學' 같은 말이다. 내 글을 조금 보았던 독자라면 철학을 이야기 할 때 이 단어를 거리낌 없이 쓰는 나를 발견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형이상학이라는 말을 쓰는데 생각보다 주저하게 된다. 그럼에도 이 말을 쓰는 이유는, 사실 이런 불쾌한 감정을 초월하고 싶다는 욕구에서 나온다. 이 단어에 약간은 불쾌감을 느끼는 이유는 스스로가 과거 그런 개념을 별로 중요하지 않게 생각했기 때문이고, 이 시대가 이런 단어에 귀를 기울이고 싶지 않아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시대의 산물이자 젊은 사람으로서, 그것을 불쾌하지 않으면서 쓰는게 가능한지 의심이들정도로 형이상학이라는 단어에는 나를 자극하는 괴물이 숨겨져 있다고 느낀다. 플라톤은 자신의 학교 표지판에 이렇게 써놓았다고 한다.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들어오지 말라'. 사실 형이상학이란, 단지 취향의 다름일수도 있다. 어떤 사람의 경우는 그것을 완강히 거부하기도 한다. 따라서 거의 종교적인것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따라서 현실에 가시적으로 기능하지만 분명히 형이상학적인 수학이라는 매개로, 입학자의 취향을 테스트하는 문장이 아닌가 생각해보게 된다. 종교는 어떻게 보면 재능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철학적인 '존재자'같은 것이 있느냐 없느냐로 믿음이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밀란 쿤데라는 번역이 아름다울 때는 충실할 때 뿐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사실 번역가의 재능은 텍스트를 믿는 재능인지도 모른다. 원문에 대해 충실한다는게 얼마나 어려운지는 외서를 사서 한국어로 스스로 번역해서 읽어본다면 느끼게 된다. 그것에 대한 수고는 텍스트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전제로한다. 하람 푸드를 먹는다고 이슬람교도들이 처벌받지는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할랄 푸드를 먹고자하는 그들의 행위는 전적인 믿음을 표방한다.


형이상학이라는 말을 조금 더 현대적으로 표현 할 만한게 없을까. 존재자? 사실 그 말도 하이데거 시절 쓰여진 말이라 별로 새롭진 않다. 학문에서 1세기라는 시간은 짧은 시간인지도 모르지만, 살아가는 인생에서 새롭다는 것은 적어도 10년 정도의 범위가 아닐까. 나는 대체 할 말을 찾지 못하여 그냥 쓰는 것이다. 이 말외에도 나를 불편하게 하는 단어들은 넘쳐난다. 다만 그것을 그냥 쓰는 것은, 어짜피 쓸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것에 사족을 붙이는게 추해보이고, 나의 것들을 남발하는 생각이들기에 그냥 쓴다. 어떤 특정 단어들에는 분명 존재자 마냥 그 단어를 내 삶에서 기능하게 하는 무언가가 존재한다고 느낀다. 그 단어는 내 삶에서 그렇게 밖에 쓰여지지 않는다는 맥락. 따라서 그 단어가 나의 맥락에서 벗어난다면 불편한 것이다. 사회적인 맥락에서 그것이 다를지라도, 나는 나만의 맥락에서 단어를 선별하고 싶다는 완고한 고집이다. 그런 똥고집을 항상 부릴 수는 없기 때문에 그냥 쓰는 것이다. 그리고 너무나 그것에만 천착한다면, 단어에 대해 민감도가 지나치게 커지기 때문에 나의 삶은 힘들어진다. 단어를 끌어모으는 데 인간은 중력이 필요하다. 단어들이 내 삶 속에서 재생산 될 때에는 나의 질량도 커지는 것 같다. 그것이 나이듬이고, 경험이고, 숙련이겠지만, 가끔은 백지 상태로 돌려보내고 싶다는 충동적인 욕구가 내면에서 올라오기도 한다. 그것은 순백에 대한 갈망이다. 나의 그림이 질려버린 것이다. 그림을 새로 그리고 싶지만 인생에 도화지는 한 장만 주어진다. 답안지를 바꾸어 주는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지우개로 지운다해도 연필 자국이 종이에 상흔을 남기는 것 처럼, 우리는 완전한 소실을 바라기란 힘들어 보인다.


사실 말이라는 것 이외에도 사물에도 그런 불편함은 증대된다. 그러나 사물에 대해 언명한 것이 언어이므로 우리는 단어만 들어도 벌벌 떠는 사냥개 마냥 위태로움을 느낀다. 가령 공사장에서 다치게 되면 공구리들 이름만 들어도 자신의 상처는 공명하게 된다. 이렇듯 말이라는 것은 어떤 가능성으로 기능한다. 이미 우리에게 경험된 하나의 혹은 여러개의 가능성들이 공명하며 내 속에 그것들이 살아있다고 손을 흔든다. 그러나 가끔은 그런 것들을 관리해야 한다. 지나친 트라우마로 괴로워하지 않기 위해, 점호를 실시해야 한다.


그러므로 사람마다 하나의 단어 조차도 얼마나 다르게 생각하는지는 대화하다 보면 느낄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단어에 대해 트라우마 수준의 반응을 보이는 사람도 있다. 그 사람들에게는 피해서 말하는 게 좋다. 가끔은 그런 말들이 왜 불편하냐고 캐뭍고 싶지만, 하지 않는다. 오로지 왠지모를 쓸쓸함만이 남아있게 된다. 무시하고 지나가야하는 지금의 시점이 원망스러워도 대화를 이어나간다. 우리의 대화란 이런 식이다. 그것을 물어야 할 순간도 존재하지만, 이미 물은 순간 단어는 벗겨지기에 아무런 감정도 남지 않는다. 그 사람의 사전의 한 페이지를 읽는 것과 다름 없다. 따라서 읽는 순간 해소된다. 책을 읽다 보면 하나 둘 모르는 단어가 튀어나온다. 나는 그걸 무시한다. 귀찮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휘력이 별로 좋지 않은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가끔은 찾아보게 된다.


가끔은 책을 읽다가 모르는 단어가 나와도 찾기 싫을 때가 많다. 그러나 외국어 공부를 취미 삼아 몇 년 해본 입장으로 외국어 단어는 잘 찾아보게 된다. 그 차이를 스스로 고심해 보면, 모국어가 가지는 모국어-존재자의 범위를 확장하고 싶지 않다는 게으름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것이 나태인 것 만은 아니다. 존재자의 확장은 필시 고통의 증대를 가져온다. 나는 앞서서 단어의 무게가 인간의 질량을 높이는 행위라고 이야기 한 적 있다. 따라서 내가 의미를 부여하는 단어가 많아질 수록 나의 고통은 더해질 것이라는 직관이 사전 색인 찾기를 주저하게 만드는지도 모른다. 이게 나태를 인정하기 싫다는 핑계에만 불과한 것은 아니다. 나는 글을 쓸때 대게 한자어부터 튀어나 온다. 그러나 나 역시 한자어의 미감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다른 말들을 찾게 된다. 그럴 때마다 '차라리 몰랐으면' 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한 문장 쓸 때마다 ~적 같은 한자어가 튀어나오면 고민해보게 된다. 그러나 그것을 가끔은 무시해야한다. 어짜피 다를 것이 없는 말이라면 말이다. 사전에 모든 말에 의미 부여란 불가능하기에 가끔은 그냥 쓰게 된다. 한자어가 가지는 개념성에 몸을 맡기고 싶지만, 부유하는 말들을 쓰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그것들을 피하게 된다. 예를 들면 감정-마음. 정을 느낀다라는 감정感情에는 술어에 의해 조금 나아간 말이다. 마음은 우리에게 한국어 화자로서 단일 대상을 인식하게 한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의 언어를 모국어로 쓴다지만, 각자 다른 사전을 지니고 있다. 오로지 우리에게 허용되는 말들은 사전의 정의가 쓰여지지 않은 나에게 벗어난 말들 뿐이다. 그것들이 오히려 공감을 말하기에 적절한 언어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모르는 언어들이야 말로 내가 자유롭게 쓰기가 가능하다. 그것들은 타인에게 더럽혀지기도 한다. 우리의 마음이 담긴 언어들로는 공감하기 쉽지 않다. 그것은 이미 타인에게는 단절된 나만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타인이 같은 말을 쓸지라도 그것의 용법은 미묘하게 다르다. 그렇기에 날이 서게 된다. 그 말은 그렇게 쓰는게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싶지만, 보통의 경우는 넘어가게 된다. 따라서 외려 공감이라는 말들은, 내가 정의를 쓰지 않는 다른 단어들로 해야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우리는 일정부분 말들에 대해 책임을 지게 된다. 사전 편찬에 책임을 자연스럽게 스스로 부과하게 된다. 그것들을 짊어지고 말들을 이어 붙이기란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그렇기에 많은 짐을 내 등에 쌓고 싶지 않은 것이다. 책을 읽을 때 모르는 단어가 나올지라도, 그것이 흥미롭지 않다면 불필요한 짐을 지우는 꼴이 된다. 찾아봐야 한다는 것도 결국은 부유하는 언설에 불과하다. 성과의 측면, 교육의 측면이지, 개인의 측면은 아니다. 모르고 사는게 가끔은 약이라고들 하지만, 언어에 대해 과한 탐구심을 발휘하는 것은 나를 학대하는 것과 마찬가지인지도 모르겠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후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