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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미레이트 기내 라운지

by 구름 위 기록자

에미레이트 항공의 비즈니스 클래스 뒤편에는

‘기내 라운지’라는 공간이 있다.
퍼스트와 비즈니스 클래스 승객이라면 누구나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이곳에는, 은은한 조명과

TV 스크린, 앉을 수 있는 테이블,

그리고 각종 와인과 샴페인, 음료가 준비되어 있다.


이 라운지를 운영하는 승무원을 우리는

‘라운지 오퍼레이터’라고 부른다.
단순히 음료와 스낵을 서빙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날 라운지의 분위기를 조율하는

무대 감독이자 이야기 전달자다.


나는 비즈니스 클래스에서 근무할 때 이 포지션을 가장 좋아했다.
회사 프로필에도 ‘라운지 오퍼레이터가 저의 최애

포지션입니다’라고 적어둘 정도였고,

덕분에 사무장님들이 포지션을 정할 때면 종종 나를

그 자리에 배치해 주곤 했다.


라운지를 좋아한 이유는 명확하다.
그곳에는 늘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정장을 입은 사업가, 허니문을 떠나는 신혼부부, 와인에 진심인 소믈리에 자격증 보유 승객까지-
모두가 그 작은 테이블 앞에서 각자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물론 현실은 낭만만큼 여유롭지 않았다.


특히 오후 이륙 편에서는 라운지가 준비되기도 전에

승객들이 몰려들어 정신없이 바빴고,

런던이나 암스테르담처럼 여행객이 많은 노선에서는 라운지가 바(Bar)처럼 북적였다.
좁은 공간에서 장시간 서서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다 보니

14시간의 비행이 끝나면 다리는 늘 퉁퉁 부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언제나 기꺼이 그 자리를 맡았다.

짧지만 진한 이야기들이 오가는 그 공간이 내게는 가장 ‘살아 있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라운지에 대한 애정은 퍼스트 클래스로 승진한 이후에도 변함없었다.
퍼스트 클래스에서는 더 이상 라운지를 오퍼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아쉽게 느껴졌을 정도다.


그래서였을까. 승진 전엔 회사 프로필에 이렇게 적어두기도 했다.

“별점 5개짜리 라운지를 원하신다면, 포지션은 저에게로.”

그 문구를 본 사무장님들은 브리핑 시간마다 웃으며 말했다.


“오늘 우리 라운지는 별 다섯이겠네. 기대할게요!”


그리고 나는 정말로, 그날의 라운지를 최고의 무대로 만들고 싶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날은 2022년 월드컵 시즌이었다.
모로코와 크로아티아의 3·4위 전이 한창이었고, 비행은 하늘 위를 조용히 날고 있었다.
국적과 상관없이 승객들이 라운지로 모여들었다.


“우리가 이기면 샴페인은 다 우리 겁니다!”
“세상에, 우리가 훨씬 잘하는데요? 이기겠는데요?”


그날 라운지는 작은 펍이자 응원석이 되었다.
일을 하던 크루들도 슬쩍슬쩍 라운지로 와 경기를 확인했고,

모로코가 골을 넣는 순간, 한 모로코인 크루는 승객들과 얼싸안고 기쁨을 나눴다.

경기가 끝난 뒤, 한 승객이 내게 말했다.

“비행기에서 이렇게 월드컵을 함께 보게 될 줄이야. 정말 최고의 경험이었어요.”


그 말이 나에겐 최고의 별점이었다.


뜻밖의 해프닝도 많았다.

한 번은 두바이에서 멜버른으로 향하는 비행이었다.
이륙 전부터 승객들은 여행의 설렘으로 들떠 있었고, 나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이분들, 이륙하자마자 라운지로 몰려들겠구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라운지는 아직 준비도 되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줄지어 들어오고,

누가 먼저였는지도 모를 만큼 북적였다.

그 순간 나는 종이 냅킨에 번호를 적기 시작했다.


“라운지 준비 중입니다. 번호표대로 음료를 준비해 드릴게요!”

“넘버 원! 니그로니!”


웃으며 외치자, 인상이 굳어 있던

승객들도 하나둘 미소를 지었다.

승객들은 서로 번호표를 바꿔가며 순서를 정하고,

라운지는 그날 저녁 가장 유쾌한 장소가 되었다.

물론 그 광경을 본 부사무장님은 마냥 좋아하시진

않았지만 말이다.


다른 날엔 칵테일에 일가견이 있는 승객이

자신의 레시피를 내밀었다.


커피, 오렌지 주스, 시럽,

그리고 진이 들어간 특별한 조합이었다.


우리는 그 칵테일에 그 승객의 이름을 붙였고,


라운지에선 그날만의 ‘시그니처 칵테일’이 탄생했다.


크리스마스에는 크루들이

각자 가져온 장식으로 라운지를 꾸민다.

진저쿠키와 몰드와인이 테이블에 오르고,

작은 트리에 조명이 하나씩 켜진다.


밸런타인데이에는 스페셜 초콜릿과 코코아,

테니스 시즌엔 테니스공 모양의 디저트가 준비된다.


라운지는 늘 누군가의 특별한 순간을 함께했다.
몰래 준비한 생일 케이크에 감동의 눈물을 흘리던 부부,
새해 카운트다운을 승무원들과 함께 외치며

손을 맞잡던 승객들.
그 조용하고 작은 공간에는

언제나 세상의 온기가 가득했다.


잠이 오지 않아 라운지로 와 수다를 떨던 승객,
책을 읽으며 조용히 시간을 보내던 이에게 건넨

따뜻한 차 한 잔,
화상 회의에 집중하던 승객에게 내민 진한

블랙커피까지

라운지는

나에게 ‘사람 사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무대였다.


그리고 언젠가,
그들의 기억 속 어느 한 장면에 나의 미소도 함께

떠오를 수 있다면, 그 사실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행복하다.


지금도 가끔,
라운지에서 쉐이커를 흔들고 있는 동료를

바라보며 생각한다.


오늘 그 칵테일엔
어떤 색깔의,
어떤 이야기가 담기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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