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감정 — 절망을 닮았다

언젠가는 반려동물을 데려와야 한다

by 구문도

절망을 닮은 감정이 있다. 그런데 절망과 같지는 않고, 또 따지자면 고독의 일종이다. 그러면 절망이 아닌 고독이라 불러야 하지 않느냐 하겠지만, 단순히 고독 혹은 외로움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감정이다. 조금 더 생각해 보니 절망뿐 아니라 공포를 닮았다. 절망과 공포라는 앙금을 외로움이라는 덩어리로 감싼 떡이라고 할까?


10대까지는 이해되지 않는 감정이었다. 어쩌면 그 정도로 깊은 감정을 분리할만한 분해능이 없었다. 이것은 주변에 사람이 있다고 해소되지는 않는데, 사람이 없으면 악화는 가능하다. 개인적으로 이것에 대한 해답은 배우자나 아이보다는 차라리 안드로이드나(운영체제 아니고 로봇 말하는 것 맞다) 반려동물이 가깝다고 생각하지만, 역시 완전한 해답은 아니다.


이런 생각을 왜 하게 되었냐면, 배우자도 아이도 없는 내가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면 인생에 무엇을 갖는가 떠올리게 되어서 그렇다. 내가 뒤돌아보면 그곳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모두에게 안전망이다. 이 안전망은 사람마다 정의가 다를 것 같다. 누군가는 지인과 배우자, 아이도 그 안전망에 속할 테고, 누군가에겐 자기와 피를 나눈 부모님만이 속할 테고, 누군가에겐 부모조차도 안전망이 되지 못해서 마치 벼랑 끝을 디디고 있는 것 같을 수도 있겠다.


이사해서 내 작업실과 침실에 무엇을 둘지 즐겁게 구상하다가 이상하게 동물을 두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이유를 모르겠어서 의아해함과 동시에 가능한 동물군을 추려 나갔다. 결론은 없다였다. 쉽게 데려올 수 있는 동물이란 없다. 쉽게 데려올 수 있는 동물은 쉽게 죽는다. 어렵게 데려올 수 있는 동물은 어려운 이유가 있다. 동등한 입장에서 의지가 되는 동물은 적다. 단순하지 않은 정도의 각오를 내게 하게 만든다.


퇴사를 하고 사람을 보는 일이 줄어서 외로움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하겠지, 간주했지만 사실 직장 동료는 인생의 고독을 덜어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저 덮게 만든다. 장마철 물이 빠지지 않는 배수구처럼 위를 낙엽과 담배꽁초로 덮어서 그 아래에 깊은 수렁이 있다는 걸 사람들이 잠시 잊게끔 한다. 큰 물줄기가 쓸어가 버리고 나면 아, 이 아래엔 공동이 있었구나 깨닫는다. 그러면 사람은 부모도, 배우자도, 아이도, 반려동물도 그 무엇도 그 공동을 채울 수 없음을 깨닫고 망연함과 공포를 느끼고는, 다시 그 구멍을 덮어버린다. 채울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아이를 낳거나, 배우자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거나, 좋은 친구를 두거나 하는 것은 다른 구멍을 파는 것과 같다. 원래 있던 배수구 아래의 공동은 채워지지 않는다. 그것은 모두가 질 짐이다. 안타깝게도 나는 이 곁가지 구멍이 몇 개 없다. 그래서 가장 거대한 공동을 자주 들여다보게 된다. 이 공동이 단순한 구멍이 아님을 깨달았다. 쳐다볼수록 크기가 커진다. 이럴 때면 나는 발작적으로 반려동물을 찾고, 몇 없는 친구에게 연락을 돌려 약속을 잡고, 괜히 부모님의 건강을 체크한다. 날 버리고 가지 마. 나는 이 공동을 혼자 감당할 준비가 안 되었어.


지난주의 집착적인 반려동물 검색은 이런 이유였던 모양이다. 동물은 죄가 없으니까 이런 이유로 데려올 수는 없다. 좀 더 준비가 되면 데려와야지. 데려오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없다. 그건 나를 지키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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