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중 Re:Classic 07화

파격의 아이콘 조선을 뜨겁게 달구다‘열하(熱河) 일기'

by In My Library

원제 熱河日記 (열하일기 1912)

작가 연암 박지원 (1740 ~ 1805)



아아, 사람들은 늘 스스로를 보고자 하나 제대로 볼 수가 없다.
그런 즉 때로 바보나 미치광이처럼 다른 사람이 되어
자신을 돌아볼 때야 비로소 자신이 다른 존재와 다를 바 없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런 경지에 이르러야 비로소 얽매임이 없이 자유로워진다.
성인은 이 도를 운용하셨기에
세상을 버리고도 번민이 없었고,
홀로 서 있어도 두려움이 없었다.
-관내정사 편-



명작을 넘은 문화혁명

와! 하얀 페이지 위에 첫 문장을 어떻게 시작할지를 한참 고민했다.

정말 대단한 책이다.

하루하루 그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여정은 물론 흥미로웠다.

하지만 책 읽기를 끝내고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중국의 풍경과 진귀한 물건들이 아닌

‘연암’이라는 ‘인물’이다.


이 책은 여행기를 넘어 ‘박지원’이라는 인간을 체험하는 통로이다.

그의 눈, 그의 말, 그의 고뇌, 그가 만지고 느끼는 그 모든 감각,

그의 신랄한 입담과 겁 없는 자존감에 나조차 어깨가 으쓱해진다.

245년이라는 시간을 뛰어넘어 나는 18세기의 중국을 그와 함께 걸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방송에 데뷔했을 때가 생각난다.

듣도 보도 못한 처음 듣는 노래에 ‘심사’조차 제대로 받을 수 없었던…

그러나 ‘서태지와 아이들’은 결국 대한민국 음악계의 판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그 시대를 살아보지 못했지만,

아마 ‘열하일기’가 출판된 시점의 조선 지식인들이 느꼈을 감정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이 뭐꼬…’


읽어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문체,

풍부한 묘사 그리고 대중적인 표현들.

수많은 대화들과 현재형의 내레이션 등

읽기 위한 글이 아닌 시대와 함께 살아 있는 글을 그는 보여주었다.

'연암체'라고 불리며 새로운 문체의 시작이다.


박지원은 무려 10회에 걸쳐 과거에 낙방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는 고문 중심의 문체를 거부하여 자진 낙방한 것이라고 한다.

안타깝게도 조선은 그의 시대를 따라가지 못했다.


그는 북학파로 분류되며 그저 조선 후기의 실학자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시선, 그의 철학 그리고 그의 방대한 지식과 세상을 바라보는 통찰력으로 비추어 볼 때

나는 오히려 그를 조선후기의 정점을 찍은 ‘사상가’라고 말하고 싶다.

그저 이용후생 실사구시 등의 4자성어로 그를 가리기엔 너무나 반짝반짝 빛나는 존재이다.


오래된 책을 읽을 때 가장 고민이 되는 부분은 누구의 책을 읽을 것인가이다!

한문에 뛰어나다면 원본을 그대로 읽어 본다면 좋겠지만, 21세기를 살아가는 대한민국 국민 중에 그것이 가능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어떤 번역판을 볼 것인가가 결국 관건이다.


열하일기는 총 26권(10 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의 여정을 일자별로 묘사하고 있으며, 도강록, 성경잡지, 일신수필, 관내정사, 막북행정록, 태학유관록, 구외이문, 환여도중록, 금료소초, 옥갑야화, 향도기략, 알성퇴술, 앙엽기, 경개록, 황교문답, 행재잡록, 반선시말, 희보명목, 찰십륜포, 망양록, 심세편, 곡정필담, 동란섭필, 산장잡기, 환희기, 피서록이 그 목차이다.


유명한 ‘호질’은 관재정사, 그리고 ‘허생전’은 옥갑야화의 일부이다.


두 이야기가 마치 단편처럼 유명하게 일단 알려져 있지만, 여행기 안에 나오는 이야기 하나하나가 참으로 재미난 것이 많다. 게다가 교훈은 덤이다.


‘열하일기’ 같은 인기 서적의 경우는 정말 많은 번역판이 존재하는데, 한참을 고민하다가 고미숙 작가님의 책을 택했다. 이유는 총 3권의 열하일기 관련 책을 만드셨는데, 그만큼 그녀의 열하일기에 대한 그녀의 애정이 크다는 의미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역시 ‘사랑’이었다. 그림과 사진 자료도 풍부해서 소장하는 것이 당연할 만큼 심혈을 기울여 만든 책이다. 좁은 아파트에 살아가는 나는 책 한 권이 늘어날 때마다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1인이지만, 나중에 선물로 누군가에게 주더라도 일단은 ‘박지원’에 대한 애정으로 이 책의 소장을 결심한다.


‘열하’가 어디인가?

1780년(정조 4년) 40대의 박지원은 8촌형인 박명원을 따라 청나라 건륭황제의 70세 생일 축하 사절로 참여할 기회를 얻게 된다.

본격적인 여정은 압록강을 건너면서 시작되어 심양, 산해관, 연경(북경)에서 황제의 피서산장이 있던 열하로, 그리고 다시 북경을 거쳐 귀국하기까지 5개월에 걸친 여정으로 압록강에서 연경까지의 거리는 약 2천3 백여리라고 한다. Km로 환산해 보니 903.27km 정도 된다.


열하일기경로_우리역사넷.jpg 열하일기 경로 [출처]우리역사 넷


‘열하’는 문자 그대로 뜨거운 강이라는 의미이며 현재 중국 하북성의 청더지역이다.

온천이 많고 따뜻한 지역으로 청나라 황제들의 여름별장이 있으며

특히 강희제와 건륭제는 이곳에서 종종 외국의 사신을 맞이했다고 알려져 있다.


연경에 도착한 박지원 일행은 황제의 요청에 의해 다시 열하로 향하게 되는데

이 5일간의 행적을 담은 막북행정록을 보면 하룻밤 사이에 강을 9번 건넜다고 기록되어 있다.

거친 날씨에 대한 기록도 상당히 많은 편인데, 당시의 여행길이 안전이나 편안함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가끔 대하드라마를 TV에서 보다보면 중국 사신으로 보내진다고 하여 가족들이 모두 슬퍼하고 걱정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새삼 우리가 얼마나 대단한 세상에 살고 있는지 감사하게 된다.


열하에 도착한 박지원 일행은 6일간 머물면서 중국학자들과 함께 태학(국자감)을 방문하고 그들과 다양한 분야에 걸쳐 토론하는 시간을 가지게 된다. 이것이 태학유관록이며 박지원의 폭넓은 지식과 위트가 돋보이는 장면들이 많다.



큰 잔에다 술을 몽땅 따른 뒤, 단번에 주욱 들이켰다.
오랑캐들이 모두 눈이 휘둥그레진다.
호오~탄식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기가 꺽인 기색이 역력하다.
중국은 술 마시는 법이 점잖아서 한여름에도 반드시 데워 마신다.
심지어 소주까지도 데워 마신다.
거디가 술잔은 콩알만 하다.
한데도, 잔을 이에 대고 홀짝홀짝 쪼잔하게 마신다.
단번에 털어 넣는 법이 절대 없다.
다른 오랑캐들 역시 술 마시는 법이 대개 이런 식이다.
큰 잔으로 마시거나 한꺼번에 주욱 들이켜는 풍속 같은 건 일체 없다.
그러니 내가 넉 냥이나 되는 찬 술을
단숨에 들이켜는 걸 보고 얼마나 놀랐겠는가.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저들을 겁주기 위해 부러 대담한 척한 것일 뿐이다.


박지원은 청나라 최고의 교육기관인 태학이 그저 형식적인 학문을 벗어나지 못함에 실망한다.

하지만 조선 또한 같은 문제를 안고 있음을 직시하며 당대의 학문과 교육체제가 현실 지향적이지 못한 것에 대한 근본적이 그의 회의를 많이 드러내고 있다.


피서산장.jpg 피서산장의 전경 [출처]내외뉴스통신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부분은 ‘황도기략’이다. 이 권은 읽다 보면 정말 중국의 스케일에 놀라게 된다.


모든 것이 단 하루에 가능한 효율성이 극대화된 한국이라는 나라에 살다 보면

간혹 다른 나라, 특히 국토 면적이 큰 나라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지기 마련이다.

대표적으로 일처리가 느린 것에 답답함을 느낄 수 있다.

적어도 미국이나 중국 러시아 인도 같은 거대한 면적을 가진 나라를 여행해보지 않았다면 말이다.


같은 나라이지만 연락이 쉬운 것이 아니라는 것,

같은 나라이지만 마치 다른 나라처럼 특유의 생활권 속에 살고 있다는 것,

심지어 다른 시간 속에 살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들.

처음 미국이라는 나라로 출장을 갔을 때 나는 꽤 큰 충격을 받았다.

아마 박지원이 본 북경의 첫인상이 그러하지 않았을까?


거대하고 정비된 도시, 넓은 도로, 체계적인 교통과 물류시스템 그리고 도시 인프라.

그 모든 것이 조선이라는, 스스로 표현하기에 바다 한 귀퉁이에 자리 잡은 작은 나라에서 온 그에겐 신선함을 넘어 경이로움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중국을 유람하는 사람에게는 다섯 가지 망년 된 바가 있다.
지위와 문벌을 서로 높이는 것은 본래 우리나라의 비루한 습속이다.
학식 있는 사람은 국내에 있을 때에도 양반 입네 내세우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 하물며 변방의 일개 사족 주제에
도리어 중국의 오래된 종족을 까보려 함에 있어서랴.
이것이 첫 번째 망년 됨이다.
-심세편-


세상에서 중국인을 우습게 보는 유일한 민족이 한국인이라고 했던가?

이 글을 보자 그 말이 떠올랐다.


중국은 가난할지 언정 한 번도 세계의 역사 속에서 사라진 적이 없는 나라이다. 그들은 어떤 형태로든 늘 패권국으로서의 위상을 유지해 왔다. 그렇지 않은가?


비록 우리가 군신의 예를 갖추어 중국을 대했던 때가 있었지만 한 번도 중국의 식민지였던 적은 없다.

중국은 왜 동쪽 귀퉁이의 작은 나라를 어찌할 수 없었을까?

그리고 그 ‘업’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것 같다.


박지원은 당시 청을 오랑캐라 여기며 우습게 여기던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말했다.

'문화의 우열은 혈통이나 전통이 아니라, 실제 삶을 얼마나 나아지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

박지원의 근심 어린 비판은 지금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쓴 약’이라고 생각된다.

명분보다는 실리에, 허망한 시스템 보다는 구체적인 방안을.

21세기의 ‘신조선’에서는 어떻게 실사구시와 이용후생을 실천할 것인가?


1780년 10월 27일 5개월간의 장정이 끝나고 박지원은 자신의 기록을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생전 열하일기는 출간되지 못했고 필사본으로 조심스럽게 유통되었다고 한다.

그의 책이 정식 출간된 것은 1912년 박지원이 죽음을 맞이하고 약 100년이 지난 후, 그의 5대손에 의해서이다. 정말 믿기지 않을 만큼 애통한 일이다. 18세기의 걸작이 20세기에 와서야 빛을 보다니…

시대가 나은 비극이다.


이 책을 읽은 소감을 한 줄로 표현한다면?

‘천하의 주인은 바뀌었지만 사람은 남았다!’



범은 착하고 성스러우며 문무를 겸비하였고,
자애롭고 효성스러우며 슬기롭고도 어질며,
씩씩하고 용맹스러우며 기운차고도 사나워서 천하에 대적할 자가 없다.
(중략) 그러나 사람들은 맹용은 무서워하지 않으면서
범은 두려워하니, 범의 위풍이 실로 대단하지 않은가.
-호질 중-


박지원(1740 ~ 1805) 반남 박 씨로 자는 중미(仲美), 호는 연암(燕巖)이다. 전통 노론 명문가의 태생으로 박제가, 이덕무, 홍대용 등 북학파와 어울리며 벼슬길에 스스로 나아가기를 거부했다. 그의 호는 그가 자주 찾던 양화진 근처의 연암정에서 가져온 것이며 자신을 연암에서 글을 쓰는 사람, '연암거사'라고 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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