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사피엔스를 위한 분노 노트 2

유한계급의 죄, 엄마의 죄

by 사피엔


울분은 세상을 망치지 않아.
울분을 끝까지 삼키는 게 세상을 망치지.


[유한계급의 죄, 엄마의 죄]


1. 읽히지 않던 책, 읽혀버린 사회


15년 전 들여왔던 책, 소스타인 베블런의 『유한계급론』.

문체는 건조했고 문제의식은 낯설었다. 책꽂이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방치되던 책이,

몇 년 전, 내 손에 잡혔다. 그리고 기적처럼 술술 읽혔다.

한 문장, 한 단어마다 밑줄과 동그라미로 덧칠한 자국이 겹쳐지며, 나는 페이지마다 무너졌다.


“그의 저서들은 비 오는 날 느긋하게 안락의자에 앉아서 읽을 만한 것들이 아니다.

그의 저서들은 한 장 한 장 천천히 곱씹어가면서 읽어야 한다.” (p.16)


그 말은 너무도 정확했다.

읽을수록 마음이 날카로워졌다.




2. 태권도 학원, 최초의 계급사회


아들이 유치원에 다닐 무렵, 태권도 학원에 등록했다.

운동량 많은 아이는 금세 땀에 젖었고, 물을 마시러 정수기로 향했다.

그러나 매번 나이 많고 덩치 큰 형들에게 밀렸다. 줄을 서도 소용없었다.


옆에서 학원을 운영하고 있던 나는 태권도 관장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 규칙이 있느냐”고. 돌아온 답변은 이랬다.

"오래 다닌 순서, 나이 많은 순서대로 물을 마시는 '암묵적 규율’이 있습니다."


순서가 아닌 힘으로 배분되는 권리.

내 아이는 이미 계급이 생성된 사회에 입문해 있었던 것이다.


검정띠가 흰띠를 배려하긴커녕,

차별을 일상화하고 강자의 논리를 내면화하는 공간.

그게 한낱 유소년 체육관이었다.


“완력을 찬양하는 풍조는 남성의 의지력이라는 이름으로

가장 명예롭게 포장된다.” (유한계급론 p.46)




3. 오징어게임의 현실성은 어디까지인가


넷플릭스 <오징어게임>.

사회 최하층의 이들이 456억 원을 두고 벌이는 생존 게임.

허구 같지만, 현실보다 덜 잔인한 픽션이다.


<오징어게임>의 가장 충격적인 사실은,

그 설정이 너무 낯익다는 것이다.

더 사납고, 더 탐욕스럽고, 더 잔인해질수록

‘성공’이라는 타이틀을 획득하는 구조.


베블런은 이미 말했었다.


“생명을 빼앗는 행위는

최고로 명예로운 것으로 여겨진다.

무기는 신성한 도구가 되고,

생산 도구는 남성의 명예를 실추시킨다.” (p.47)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도 살육과 소비 사이의 경계에서 살아간다.

무엇이 위대한가. 무엇이 우아한가.

노동은 지루하고, 투쟁은 찬란한가.




4. 죄를 짓고 있는 건 누구인가


나는 언젠가 아들에게, <오징어게임>을 봤냐고,

그 현실의 잔인함을 ‘이해'했느냐고 물었다.


나는 아이에게 물려줄 명예가 없다.

계급의 기호도 없다.

그저 사회적 기능을 익히기 위한 학교에 보내고,

몇 권의 책을 건네주는 것, 냉철한 견해를 품길 바라는 것. 그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전부였다,


그토록 미약한 조건이,

한 아이에게 물려줄 수 있는 삶의 기반이라면,

나는 자주 무릎을 꿇고 죄인이 된다.




5. 유한계급의 명예는 유한하나, 무산계급의 죄는 무한하다


베블런은 ‘유한계급’을 비판했지만,

나는 그 명예조차 소유할 수 없는

무산계급의 모성으로 살아간다.


그 옛날, 정수기 앞에서 밀려나곤 했던 아이를 위해 나는 어떤 말을 해주었어야 했을까.


그저 하루를 견디고,

밥을 짓고,

다음 날을 준비하는 일 외엔 아들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던 엄마.


나는 세월이 흐른 지금도 나약한 내게 분노한다. 훔치고 때리고 빼앗지 못한 무력한 주체로 살아왔던 죄인.

계급을 욕망하면서도, 그 세계에 입장조차 못한 불완전한 체제 밖 죄인.


그게 바로 나라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게

내 아이가 물려받을 현실이다.


이 세계의 작동 방식을 비정하다 여기면서도 나는 아이에게 제대로 설명해 주지 못했다. 그렇다고,

너는 계급이 아닌 사람을, 명예가 아닌 존엄을 바라보는 사람으로 살아달라고,도 말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나라는 사람이 슬프다. 그리고 그게 내 아이가 물려받을 현실임에 더 분노한다.


학원에서 학생들에겐 멋들어진 윤리를 떠들어대면서, 정작 내 아이에겐 한마디도 건네고 싶지 않은 윤리 나부랭이.

그렇다고 살아남는 법도 가르치지 못한 엄마. 침묵뿐인 날들 속에서, 나는 한숨이 되고, 삼키지 못한 울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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