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키치란 무엇인가

- 쿤데라, 조르바, 그리고 치셤 신부를 다시 보다

by 사피엔



쿤데라는 말한다.
“키치는 감정의 진실이 아니라, 감정의 연출이다.”사랑, 그리움, 추억조차 키치일 수 있다는 그의 말은 우리가 진심이라 믿고 꺼내는 감정들에 일종의 의심을 던진다.



감동의 독재, 그 익숙한 장면들



보통 인간은 키치에 쌓여 살다 죽는다.

우리는 감정을 진열하고, 삶을 장면처럼 연출하며 살아간다.

감동은 진실을 가리기 쉽고, 진열된 삶은 살아 있는 삶이 아니다.


첫사랑의 기억을 꺼낼 때, 사람들은 이기심이나 모멸감은 지우고 풋풋한 설렘만을 남긴다.

가족에 대한 추억도 마찬가지다. 상처의 뿌리는 감춘 채 눈물 나는 장면만 포장한다.

SNS 속 ‘사랑이 뭐야?’ 같은 영상은 사랑의 윤리적 모순을 잘라내고, 예쁜 그림만을 보여준다.


키치는 감정의 독재다.

추한 진실, 불편한 감정, 복잡한 삶을 제거하고 감동만 남긴다.

그리고 우리는 사랑마저도 그렇게 소비한다.


사랑은 키치가 되기 쉽고, 감정은 언제나 연출될 수 있다.

그래서 진짜 인간은, 때로 카메라가 꺼진 뒤에야 등장한다.


나는 키치의 진열장 앞에서, 세 인물을 떠올린다.

감동에 침윤된 자들, 그것을 도끼로 부순 자, 애초에 몰랐던 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쿤데라,

<그리스인 조르바>,

<천국의 열쇠> 속 치셤 신부.


이제, 그 진열장 안과 밖을 차례로 들여다보려 한다.



1 쿤데라 – 키치를 해부한 철학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쿤데라는 네 인물을 정교하게 배치해 감정과 신념, 사랑이 어떻게 ‘키치’라는 감성의 독재로 굴절되는지를 탐색한다. 그들은 모두 사랑을 한다. 하지만 그 사랑은 자주 키치로 변질된다.


그중에서도 토마시는 “삶은 가볍다”는 철학 아래 수많은 여성과의 관계를 맺지만, 정작 테레자와의 사랑 앞에서는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점점 자신의 신념을 배반한다. 쾌락과 자유를 좇았던 그는, 결국 ‘사랑이라는 무게’를 받아들이며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에서 흔들리는 인간의 모순을 보여준다.


테레자는 그와 반대로, 영혼의 순수함과 도덕적 정결함에 대한 강박을 지닌 인물이다. 그녀는 토마시의 배신에도 불구하고 그를 놓지 못하고, 사랑이라는 이름의 고통 속에 스스로를 가둔다. 그녀의 감정은 숭고함을 추구하지만, 사실은 현실의 모순과 상처를 지워버리고 ‘아름답고 순결한 사랑’만을 남기려는 도덕적 키치로 가득하다. 테레자는 진실을 직면하기보다는, 감정의 진열장 안에서 정리된 슬픔에 스스로를 봉인한 인물이다.


반면 사비나는 그 진열장을 깨뜨리려 한 인물이다. 그녀는 예술가로서 모든 체계와 권위를 배신하며 키치에 대한 격렬한 저항을 선언한다. 하지만 그 저항조차 ‘자유로운 예술가’라는 자기 이미지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 사비나는 키치를 혐오했지만, 결국 ‘키치를 혐오하는 나 자신’이라는 키치적 자의식에 갇혀 있었던 아이러니한 존재다. 그녀는 키치를 넘어서려 했지만, 끝내 그 언저리에서 맴돌며 고독 속으로 사라진다.


그리고 프란츠는 쿤데라가 보여준 키치의 가장 전형적인 화신이다. 그는 사랑, 정의, 이상을 모두 ‘감동적인 장면’으로 이해하고, 그 감동에 도취된 채 사비나를 끊임없이 이상화한다. 그는 실제의 사비나가 아닌, ‘사랑하는 자신’에 도취된 채 만든 허상을 사랑했으며, 결국 진실한 감정과는 끝내 만날 수 없었다.


쿤데라는 이 네 인물을 통해 말한다. 사랑도, 믿음도, 자유도—무엇이든 불편한 진실을 삭제한 채 감동만 남긴다면 그것은 키치라고. 그리고 우리는 그 키치 안에서 가장 쉽게 위로받고, 가장 조용히 속박당한다.


테레자는 숭고한 사랑을 믿고, 프란츠는 정의롭고 도덕적인 감정에 도취된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감동적인 나’를 향한 자기애이자 연출된 감정의 극장일 뿐이다.



2. 조르바 – 키치를 파괴한 야만의 인간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다 중간에 덮은 적이 있다.

도기 만드는 손이 방해된다고, 도끼로 자기 손가락을 자르다니—

그런 야만을 받아들이기엔 내가 너무 문명화된 인간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조르바는 감정을 연출하지 않고, 고통을 미화하지 않으며,

삶을 아무 말 없이 부딪혀 사는 자였다는 걸 떠올렸다.


그는 진열장 속 아름다움을 부수고 나와, 그 어떤 감동도 없는 삶의 맨살로 뛰어들었다.


그게 야만이라면,

나는 지금 문명이라는 이름 아래 얼마나 많은 감정을 연기하며 살고 있는가?


쿤데라가 보여준 네 인물이 키치의 껍데기를 두르고 사랑과 감정에 침윤되어 있었다면, 조르바는 그 껍데기를 도끼로 깨부순 야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감정을 연출하지 않았다. 슬프다고 말하지 않고, 울었고, 좋다고 말하지 않고 웃었다.


삶을 말로 설명하기보다, 손과 발로 부딪히며 살아냈다. 도기 만드는 손에 불편이 있다고 느끼자, 아무런 미학적 망설임 없이 엄지손가락을 잘라냈던 장면은 그 자체로 키치에 대한 야만적 저항이다.


조르바는 ‘아름다움’을 위한 감정조차 의심했고, 감동 없는 삶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가 내던진 고통은, 단 한 번도 소비되지 않았다.



3. 치셤 신부 – 키치를 모른 채 살아낸 맨살의 영혼



<천국의 열쇠> 속 치셤 신부는 조용하다.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누군가를 설득하지도, 감동시키지도 않는다.


그는 고통을 미화하지 않았고, 신앙을 연출하지 않았다.


치셤은 카메라 앞에서 눈물 흘리지 않는다.

그는 카메라가 꺼진 뒤에도 살아 있는 자였다.


키치를 거부한 조르바가 육체의 야만이었다면,

치셤은 그 모든 것을 모르고 살아낸 맨살의 믿음이었다.


반면 치셤 신부는 조르바처럼 격렬하진 않았지만, 그보다 더 깊숙이 키치 바깥에서 태어난 영혼이었다. 그는 감동을 말하지 않았다. 기적을 연출하지도 않았고, 슬픔을 장면으로 꾸미지도 않았다. 누군가를 위해 울어주는 대신, 곁에 있었다. 병든 이의 손을 잡을 뿐, 위로의 언어를 되뇌지 않았다.


그는 고요한 믿음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했고, 그 고요함 안에 존재의 무게를 실었다. 치셤 신부는 감정이 아닌 행위로, 연출이 아닌 침묵으로, 빛나는 구호가 아닌 맨살의 헌신으로 살아낸 사람이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감정을 ‘보여주기 위해’ 느끼는가.

키치는 감정을 감각화하고, 삶을 장면화하며, 진실을 감동으로 포장한다.

쿤데라의 인물들이 그 안에서 무너졌다면, 조르바는 그것을 부쉈고, 치셤은 애초에 몰랐다.




이제 나를 본다.

내 감정은 얼마나 연출되어 있으며, 나는 지금 누구의 진열장 속에 놓여 있는가?

처음엔 ‘키치’라는 말 하나가 거슬렸을 뿐이었다.

왜 아름다움은 불편함을 덮고, 감동은 진실을 지우는가.

그런데 세 인물—쿤데라의 인공적 인간들, 조르바의 야성, 치셤의 고요—

그들의 얼굴을 떠올리는 사이,

나는 뜻밖의 농도 짙은 철학적 사유 한 덩이를 손에 쥐고 있었다.

그것은 누군가의 사랑보다 더 무거웠고,

누군가의 감동보다 훨씬 더 낯설고 진실했다.



키치란, 아름다움 뒤에 감춰진 불편한 진실을 끝내 보지 않으려는 태도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그 진열장 앞에서 아주 오래 서 있었다.


지금 이 글은,

그 진열장을 조용히 벗어나기 위해 내딛는 첫 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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