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나는 일기를 쓰기가 싫었다.

그렇다고 안 쓴 것도 아니다.

by 수기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의무 교육 기관을 통해 매일같이 일기를 쓰는 훈련을 배운다. 확실히 어린 시절의 나는 열심히 밀려가며 일기를 써서 제출했지만 대부분의 내용은 딱히 큰 의미가 담긴 내용은 아닐 것이다.

몇 년 전, 부모님이 은퇴를 하시면서 꽤 많은 물건들을 버리셨는데, 그중 엄마가 절대 버리지 않고 모아두었던 것 중 하나도 우리 자매가 어릴 적 쓴 일기장들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펼쳐볼 수 있을 과거의 내 일기장을 쉽게 열어볼 마음이 생기지 않는 이유는 뭘까.

뭔가 험한 감정의 조각들이 와다닥 튀어나올 것 같은 파묘의 기분을 느끼고 싶지 않은 걸까. 현실은 '오늘은 무엇을 했다. 참 재밌었다. 끝'으로 시작과 마무리가 원테이크로 이루어지는 내용들일 텐데 말이다.


거기다 나는 병적으로 내 감정을 안으로 쌓는 게 습관인 어린이였다. 물론 어린이답게 감정이 속으로 쌓여 곪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엄마 눈에 잘 보이는, 엄마 손바닥 위에서 데구루루 굴러다녔던 어린이였지만.

내 병에 대해 엄마가 완전히 알게 된 후, 한참의 시간이 흘렀을 때 엄마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생각해 보면 너는 계속 아팠어.'

말 그대로 엄마 눈에 비친 나는 언제 곪아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마음 상태로 살아왔다는 것이다.

엄마는 내 집에만 씨씨티비를 달은 게 아닌 걸까? 내 마음 안쪽에도 씨씨티비를 달아둔 걸까? 나를 너무 잘 알아서 무서운 중년의 여인 같으니.


아무튼! 그래서 그런지 어떠한 상황에서 진짜 내가 느낀 감정이 어땠고, 이런 상황이 너무 싫어서 더 이상 반복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나의 진심은 한 번도 일기장에 쓰인 적이 없었다.

글이라는 건 어딘가에 쓰이는 그 순간부터 내 머릿속에만 담겼던 비밀이 아니게 된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꼈던 것 같다. (그리고 형제가 많은 집이면 대체로 알게 모르게 서로의 일기장이 공유되기도 한다.)

감정을 배설할 줄 모르고 배설할 방법을 찾지 못했던 어린 날의 나는 그렇게 일기장에, 미니홈피에 내 거짓 감정을 꾸며내기 시작했더랬다. 진짜 배설되어야 할 감정은 내 마음속에서 썩어 문드러진 채로.


그러다 서른이 넘어 혼자 살게 되면서, 그리고 정확한 내 병명을 진단받고 약물 치료를 병행하기 시작할 무렵 나는 예쁜 핑크색의 도톰한 작은 노트 한 권을 사 오게 되었다.

'이 예쁜 노트에는 정말로 한치의 거짓 없는 내 진심만을 담겠다!'는 일념 하나로 나는 틈날 때마다 일기를 썼다. 매일 일기를 쓰지는 않았기 때문에 일기에 쓰인 날짜는 대체로 뒤죽박죽이었다. 몇 달 만에 쓰는 날도 있었고, 몇 주 만에, 며칠 만에 쓰기도 했다.

내용은 정말 지금 당장 내 머릿속을 부유하는 내용들만을 적었다. 가끔은 그날 들었던 좋은 노래의 가사나, 그날 봤던 드라마에서 인상 깊었던 대사를 쓰는 날도 있었다.

그렇게 대중없는 날짜감각으로 일기를 쓰기 시작한 지 약 2년, 한 번씩 과거의 기록을 살펴보면 정말 날 것의 그대로였다.

부당하고 고통스러운 회사생활에 대한 내용을 빠짐없이 기록한 후, 중간중간 들어간 입에 담지 못할 비속어들이 일기 끄트머리에 리마인드 되어 박박 갈겨진다.

그리고 가족에 대한, 친구에 대한 원망들이 갑자기 튀어나오는 날은 너 그때 나한테 뭐라 뭐라 했지, 나 그거 되게 기분 나빴는데 참았어. 이 또로로로롱 같은 친구야. 등등.

처음엔 되게 읽기도 싫게 부담스러운 진심들이 갈겨져 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그것마저도 지치는지 '힘들다.' 세 글자로 끝나는 날도 있고. 불자의 자녀답게 불경스러운 내용도 쓰여있더랬다. '부처님 너무해요.'

또는 돌아가신 외할머니에 대한 원망 같은 거. '할머니는 왜 그렇게 빨리 가서 나를 쓸쓸하게 해?' '나 잠 좀 자게 해 줘, 할머니.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 우리 사이가 그 정도밖에 안 돼?'

같은 불경스럽기 그지없는 짧은 원망들.

뭐, 간혹 우리가 일기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떠올리는 그런 일상적인 내용들의 일기들도 많긴 했더랬다.

확실한 건, 내 감정을 날것 그대로 배출해내고 나면 마음에 있는 불안이 조금은 사그라든다.

정확히 말하면 비상약을 먹은 효과가 일기를 다 쓰고 나타나기 때문일 가능성이 더 높겠지만, 아무튼 그렇다.

그래서 이 글을 쓰기로 했다.

일기인 듯 일기 아닌 일기 같은 글을 쓰며 나 자신에게 정신승리를 안겨주는 이런 사람도 있다고.


그런데 중요한 문제가 있는 것 같다.

나는 글재주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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