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문회가 아니고 면담인데요.

청문회는 본인들이 당하셔야 하는 것이 아닐까

by 수기

신경정신과를 통해 약물 치료를 시작하면서부터 모든 정신적인 증상들이 너무 심해졌고, 평생을 달고 살던 불면증은 말해 뭐 해. 출근을 하면 퇴근을 할 때까지 매일이 불안하고 두려웠다.

병가를 쓰는 건 쉽다. 그냥 팀장에게 "저, 아파요. 이렇게 아프니까(진단서를 멋지게 들이밀며) 병가 승인해주십셔!" 하고 쉬면 되는 거다. 그런데 여기서부터가 문제였다.

이 회사는 병가가 고작 2주밖에 되지 않았다. 정신이 망가졌는데 2주 만에 좀 살만한 몰골로 다시 출근을 한다는 게 맞는 건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틈만 나면 사규를 박박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휴직에 대한 내용을 찾았고.

의사도 인정하고 회사도 인정하는 질병을 증명받아오면 n개월의 휴직을 사용할 수 있고, 급여의 일부가 지급된다는 내용이었다. 마침 의사 선생님은 내게 퇴사 혹은 장기간의 휴직을 얻어오라며 진료 때마다 말씀하셨기 때문에 내용을 제대로 확인하자마자 병원으로 튀어가 의사 선생님을 통해 6개월의 휴식이 필요하다는 진단서를 받아왔다.

사실 의사 선생님께서는 6개월도 짧다고 하셨다.


휴직 신청에 필요한 사유서까지 방대한 분량으로 작성한 후 나는 팀장에게 진단서와 사유서를 들이밀었다. 그리고 팀장과 본부장에게 회의실로 불려 갔다.

그때의 나는 또 뇌가 순진한 사람처럼 저 두 사람이 나를 불러서 무슨 얘기를 할지 조금 기대했던 것도 같다. 하지만 현실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서류는 여러 장이었다. 진단서에 쓰인 내 병명은 여러 개였다. 불면증, 우울증, 불안장애, 원인불명의 공황발작 등. 이러한 사유로 원활한 직장 생활을 하기가 어려우니 수기 환자는 최소 6개월 이상의 휴식이 필요하다는 의사 선생님의 진단서였다. 또 다른 서류는 사유서였는데 이 회사를 다니면서 이런 일, 저런 일을 겪으며 어떤 증상을 느끼기 시작했고, 나에 대해 누군가가 악의적인 소문을 퍼트리고 다니기 시작하며 나는 온전한 정신 상태로 업무에 집중할 수 없게 되었기에 4개월 정도만 휴직을 했으면 좋겠다는, 너무나도 기승전결이 완벽한 휴직 사유서였다.


그런데 회의실에 나란히 앉은 팀장과 본부장은 한참을 읽었다. 진단서 말고 사유서만.

한참을 아무 말 없이 내 사유서를 읽던 내 직장 생활 고충의 원흉 1, 2는 "아, 그래서 네가 이런저런 마음의 병을 얻었구나. 많이 힘들었을 텐데, 내가 챙겨주지 못해서 미안하네요." 하는 빈껍데기만 쓰인 위로의 말 대신 "여기 쓰인 '직장 내 괴롭힘'이라는 단어가 정확히 어떤 직원의 어떤 행동으로 인해 쓰인 단어죠?"라던지 "하단에 쓰신 '고충을 주셨다'는 주체가 혹시 저를 의미합니까?"등 불쾌한 감정을 가감 없이 드러내며 부하 직원의 정신적 병증으로 인한 휴직 면담이라는 타이틀이 무색하게도 하등 쓸모없는 감정 소모전으로 이 면담을 망치기 시작했다.


혹시 몰라하는 말이지만 내 사유서에는 사적인 감정이 1도 들어가 있지 않았다. 사유서 안에 감정이 섞이기 시작하면 내가 이만큼이나 써놓은 팩트들은 그저 감정놀음의 증거밖에 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기에, 나는 사유서를 타임라인 쓰듯이 정확한 날짜와 그날 벌어진 사건, 그때 나에게 이렇게 저렇게 말을 했던 사람이 누구인지까지 구체적으로 썼더랬다. 그리고 마지막은 그로 인해 내 업무에 이런 차질이 생겼고, 자존감이 조금 떨어졌다... 같은 병으로 연결되는 감정의 연결고리 정도?


"그 부분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요, 여기 진단서를 보시면."

"아니, 그러니까 말을 해 보라고요. 이렇게 썼으면 주어가 있으니까 쓴 거 아녜요."

이런 식의 대화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극도의 스트레스가 밀려와 눈앞이 노래지고 있었다. 이대로 졸도하는 결말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내가 지금 졸도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같은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그 면담을 견뎠던 것 같다.


그래서 내 휴직 신청 면담은 결국 본인들의 감정적인 궁금증만 해소된 채 어이없게도 별 결말 없이 끝났고, 그날 퇴근을 위해 지하철 계단을 내려가는데.


다리에 힘이 풀리며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다.

이대로 걷다간 굴러 떨어질 것 같은 공포가 밀려왔다.


후들후들 거리는 다리에 억지로 힘을 주며 계단 손잡이를 목숨줄 마냥 쥐어 잡고 겨우 하나하나 내려가는데 따르르릉 소리가 들렸다. 내가 타야 할 지하철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렇게 지하철을 놓친 나는 내려왔던 계단을 힘겹게 다시 올라와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이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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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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