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를 깎은 끝에서

코를 깨물고 싶다.

by 유은


‘나를 깎은 이성이 진짜 첫사랑이고, 평생 잊히지 않는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 맞는 말 같았다. 그런데 그 ‘깎는다’는 말이, 문득 두 가지 의미로 다가왔다. 내가 너를 깎았고, 너도 나를 깎았다. 다만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는 너의 외모와 습관을 다듬었다. 피부과에 함께 다녔고, 옷과 머리 스타일까지 내가 골랐다. 어떤 화장품을 써야 하는지, 선크림은 무엇이 좋은지, 연고 하나까지도 직접 알아보고 사다 주었다. 레이저 제모는 어디서 받으면 좋은지, 추가 시술은 어떤 게 효과적인지까지 정리해서 공유했다. 강요는 아니었다. 너는 그런 나를 좋아했고, 취향도 잘 맞았다. 전화를 하며 물건을 고르고, 정보를 나누던 시간은 우리에게 작은 놀이 같았다. 나는 너와 관련된 일이라면 뭐든 즐거웠고 너는 그걸 자연스럽게 받아주었다.


일상 스케줄이나 모든 계획과 처리도 내 몫이었다. 나는 원래 그런 걸 잘했고, 또 좋아했고, 너의 부탁이 너무 기꺼웠으니까. 아니, 우리는 서로의 역할이 명확했고 그건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난 그렇게나 자연스러운 우리 관계에 만족했다. 지금 와 생각하면, 그 많은 에너지를 어떻게 쏟을 수 있었을까 싶다. 이제는 그만큼 못 한다. 누구를 만나도 그냥 있는 모습 그대로 만나고 싶다. 더는 무언가를 애써 바꾸려 하지 않고, 억지로 나를 들이밀지도 않기로 했다. 애초에 너와의 관계는 ‘연애’라기보다는 어떤 ‘이겨내기’였던 것 같다. 끊임없이 버티고, 맞추고, 결국 너에게 “좀 내려놔”라는 말까지 들으며 아등바등했다. 다시는 그런 식으로 사랑하고 싶지 않다. 나는 그만큼 지쳤고 많이 무뎌졌다.


아마 너를 가족처럼 느껴서였을지도 모른다. 아빠 같고, 오빠 같고, 어쩐 땐 아들 같았던 너. 너무 가까워서 경계가 사라졌고, 그게 사랑인 줄 알았다. 하지만 네 가족은 언제나 너의 울타리 안에만 있었고, 나는 그 울타리 밖에서 맴돌 뿐이었다. 우리는 너무 달랐다.


그리고 너도 나를 깎았다. 내 자유로움과 감정의 즉흥성, 무모함을 줄이고 정제했다. 덕분에 나는 조금 더 안정적인 관계를 맺는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일에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늘 움츠리고, 조심하게 되었다. 신발끈 하나 묶지 못하고 사소한 일에 흔들리는 나를 보고, 너는 내게 정신질환 이야기를 꺼냈다. 그 말 이후로 난 무엇을 하든 겁을 먹게 됐고, 또 누군가가 나를 그렇게 볼까 봐, 너의 말이 전부 진실일까 봐 두려워졌다.


그럼에도 너를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 너는 내게 안정감을 주었다. 처음의 평온함이 얼마나 깊고 귀한 감정인지 나는 알고 있다. 네 옆에서 잠들던 시간이 좋았다. 너 하나면 모든것이 단절되어도 좋았다. 위험했지만 분명히 존재했다. 비록 마지막은 엉망이었지만. 그래서 고맙다. 나를 결혼까지 데려가지 않아서. 만약 그랬다면 나는 아마 오래, 아주 오래 불행했을 것이다. 진심으로 다행이다. 너와 함께였다면 우리는 분명, 내내 불행했을 것이다.


이제 나는 사랑 앞에서 도도한 척하다 결국 모든 걸 퍼주는 사람이 아니다. 누군가를 만나도 정확한 눈으로 조금은 더 이성적으로 나를 지키는 법을 배웠다. 앞으로의 관계에서 피해야 할 취약점도 알게 됐다. 물론 그걸 안다고 해서 다음엔 실수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우리가 잘 맞았던 점이 다른 사람과는 문제가 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래도 꽤 괜찮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불타는 사랑의 총량은 다 써버린 것 같고 잔잔한 마음만 남았다. 어쩌면, 이미 그런 사람을 만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눈을 갖게 해 준 것도 결국 너 덕이다. 넌 나를 깔끔하게 떠났다. 미련도, 집착도 없이 정리했고 덕분에 나도 담백하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 사랑하는 도중에 하는 말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도 너에게서 배우게 됐다. 너는 날 참 잘 깎았다. 그리고 나도 너를. 인정받을 순 없겠지만, 우리는 분명 서로를 변화시켰다.


서로를 깎은 끝에서, 이제는 각자의 자리에서 조금 더 단단하게, 단정하게 살아가자. 함께 있을수록 불안했고 더 불행해졌던 우리를 이제는 놓아줄 시간이다. 넌 나를 버렸고 결국엔 고치려 들었고, 마지막엔 모든 걸 내 탓으로 돌렸다. 너의 감정은 사랑과 닮았지만, 사랑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너를 귀엽다고 생각했던 나를 기억한다. 너는 내 단순한 회복력을 사이코 같다고 말했지만, 나는 그래도 너를 사랑스러워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쉽게 무너지고, 또 금세 아무 일 없던 듯 웃어버리는 그 무지한 나를, 너는 비난했지만. 토할 만큼 어지러운 대화를 나누고도, 내 옆에 누워 잠든 너를 보며 코를 깨물고 싶을 만큼 사랑했다. 그 순간만큼은 모든 게 다 괜찮아 보였다. 그리고 언젠가 나도 그런 눈빛을 받고 싶었다. 네가 나를 바라보는 눈에 사랑이 담겨 있길 진심으로 바랐다.


하지만 넌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여유가 없는 사람이었고, 나는 더 이상 그런 여유를 구걸하며 말라가고 싶지 않다. 네가 말한 게 맞다. 너의 그릇은 내 마음을 담기엔 좁았다. 나는 이제, 나를 더 이상 깎이지 않는 쪽으로 데려가고 싶다.


그래도 고맙다. 그런 사람이 너 하나였다는 게 그리 나쁘진 않다. 여전히 네 얼굴이 떠오르면 미워 죽겠지만
동시에 또 귀엽다는 생각이 드는 이상한 사랑이었다. 나는 그렇게나 단순하고 멍청하고 해맑은 사랑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너는 그런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아서 아직도 쿡쿡 찌른다. 그래도 너의 자식에게만큼은 그런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 그렇게라도, 내가 없는 앞으로의 너에게는 어떠한 사랑이 조금은 자라나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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