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가는 질문으로 입장한다 - 중견그룹 CSO 면접

흐름을 설계하는 기술

by 도진
"임원이 되려는 자는 말을 덧붙이지 않는다.
대신 질문을 꺼내고, 흐름을 설계한다."


27년, 그리고 면접이라는 새로운 무대


나는 경력 27년 차의 전략가다. 수많은 프로젝트를 경험했지만, 최근 들어 '면접'이라는 단어가 새롭게 다가온다. 특히 전략총괄(CSO)이라는 자리를 두고 CEO와 대면하는 순간, 이것은 단순한 채용의 절차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룹의 전략을 다시 짜기 위한 리더십 테스트이고, 내가 그들의 '고민의 구조'를 어떻게 읽고, 어떤 언어로 반응하는지를 확인받는 통로였다.


27년간 나는 수많은 회의실에서 전략을 논했다. 그런데 면접장에서는 이상하게도, 내가 지금까지 해왔던 모든 것들이 다르게 보였다. 경영진 면접은 다른 어떤 자리보다 깊다. 단지 무엇을 해왔느냐가 아니라, 지금 이 조직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느냐, 그리고 당신이 그 해석을 어떤 흐름으로 전개할 수 있느냐가 본질이었다.


그때 깨달았다. 전략가는 이 흐름을 '말'로 풀지 않는다는 것을. 질문으로 시작한다는 것을.



무중력 상태의 조직을 마주하다


몇 달 전, 한 중견그룹의 전략총괄 자리에 지원했다. 오너 2세가 회장직에 오르며 리더십의 얼굴은 바뀌었지만, 구조는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는 조직이었다. 사업은 전방위로 흩어져 있고, 전략 조직은 각 계열사마다 조각난 채 '기획'이라는 이름으로만 존재했다. 계열사 간 시너지도 없고, 신사업은 매번 외부 발표로만 떠돌았다. 그리고, 그룹의 방향성은 '말'은 있지만 '길'이 없었다.


이런 조직을 보면서 나는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10년 전 내가 컨설팅했던 한 대기업과 너무 닮아 있었다. 겉보기에는 평온하지만, 내면은 무중력 상태인 조직. 리더가 교체되었지만 전략이 바뀌지 않고, 사업은 많지만 성장축은 없으며, 사람은 있지만 핵심 인재가 보이지 않는 곳.


그 시점에서 전략총괄을 채용하겠다는 결정이 내려진다는 것. 그 자체가 메시지였다.


"그룹의 구조를 다시 짜야한다."


그 순간 나는 알았다. 이 면접은 내가 무엇을 해왔는지를 묻는 자리가 아니라, 내가 이 조직의 구조를 어떻게 읽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자리라는 것을.



첫 질문이 모든 것을 바꾼다


그 면접장에서 나는 이렇게 물었다.


"전략총괄이라는 역할을 신설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무엇이었습니까?

특히 CEO님의 고민 중, 내부 역량과 외부환경 중
어느 쪽의 압력이 더 컸는지도 듣고 싶습니다."


CEO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처음 10분간 준비했을 법한 회사 소개를 멈추고 자신의 진짜 고민을 꺼내기 시작했다.


"사실은..."으로 시작하는 그의 말에서, 나는 이 조직의 진짜 모습을 보기 시작했다. 각 계열사 대표들이 그룹 차원의 전략보다는 자신의 사업 확장에만 집중하고 있다는 것, 신사업 투자 결정 과정에서 일관된 기준이 없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그 자신도 이 거대한 조직을 어떻게 이끌어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이 질문은 단지 '정보 요청'이 아니었다. 그룹 구조를 보는 눈이 있고, 리더의 무게중심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라는 신호였다. 그 순간부터 면접은 달라졌다. 나를 소개하는 자리가 아니라, 그룹을 재해석하는 대화의 장으로 바뀐 것이다.



경영진은 구조를 본다


27년간 수많은 임원들과 일해 보면서 깨달은 게 있다. 경영진은 본능적으로 느낀다. 이 사람의 말에 논리가 있는가 보다는, 이 사람이 우리 조직의 구조를 읽고 있는가를. 내가 고민하는 걸 꿰뚫고 있는가를. 내가 아직 말하지 못한 것을 먼저 언급하는가를.


그 판단은 놀랍도록 빠르다. 그래서 말로 설득하려 들면 흐름은 끊긴다. 전략가는 흐름을 만들어야 한다.


그 면접에서 나는 CEO의 말을 들으며, 이 그룹이 겪고 있는 딜레마를 읽어냈다. 성장은 해야 하는데 방향을 잡지 못하고, 혁신은 외쳐야 하는데 실행력이 없고, 시너지는 만들어야 하는데 각 사업부는 따로 놀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를 들으며, 각 계열사가 독립적으로 성장해 온 강점이 있지만, 이제는 그 강점이 오히려 그룹 차원에서는 제약이 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내가 이렇게 말하자, CEO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그가 말하지 않은 것까지 읽어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제가 보기엔 이 그룹은 '다수의 자회사'는 있지만, '하나의 방향성'은 아직 없습니다. 그리고 그게 바로 제가 여기 앉아 있는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 순간, 면접은 설득의 자리에서 공진의 장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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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가의 언어로 대화하기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내가 했던 프로젝트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는데, CEO는 내가 어떤 일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인지 파악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나는 그의 언어로, 그의 고민의 구조 안에서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는 이전 기업에서, 전략기획실이 지주-사업부-실행팀을 잇는 연결고리 역할을 하는 구조를 만든 적이 있습니다. 단순히 전략을 수립하는 게 아니라, 각 사업부의 언어를 번역해서 그룹 차원의 일관된 방향으로 정렬시키는 역할이었죠."


이때 중요한 건, 내가 과거 성과를 자랑하려던 게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 경험을 통해 이 조직에서 무엇이 가능한지, 어떤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지를 그려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 그룹에서도 각 계열사가 가진 고유한 DNA를 살리면서도, 그룹 차원에서 시너지를 만들어낼 수 있는 구조적 설계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질문하는 용기, 흐름을 만드는 기술


27년차가 되어서야 깨달은 게 있다. 질문은 무례하지 않은 개입이며, 말보다 강력한 리더십의 표현이라는 것을.


그 면접에서 나는 몇 번 더 질문을 던졌다.


"현재 각 계열사에서 추진 중인 신사업들을 보면, 공통된 성공 패턴이나 실패 요인이 있을 것 같은데요. CEO님은 어떻게 보시나요?"


"그룹 차원에서 가장 아쉬워하시는 '놓친 기회'가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이런 질문들은 CEO로 하여금 더 깊은 고민을 꺼내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는 이 조직의 진짜 모습을, 그리고 CEO의 진짜 니즈를 파악할 수 있었다.


전략가는 리듬을 심는다


전략은 보고서가 아니다. 나는 27년간 수많은 전략 보고서를 써봤지만, 정작 조직을 바꾼 건 보고서가 아니었다. 조직의 흐름, 방향의 일관성, 실행의 타이밍을 정렬하는 리듬이었다. 그 리듬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면접에서도 흐름을 만들 줄 안다.


그룹 전략 총괄이라는 자리에서는 말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기획 실무를 다룬 경험이 아니라, 그룹 구조의 결을 읽는 눈이다. 그리고 그 눈은 질문을 통해 드러난다.


그 면접을 마치고 나서, CEO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 대화를 통해, 우리가 정말 필요로 하는 게 무엇인지 더 명확해졌습니다. 단순히 전략을 세우는 사람이 아니라, 조직의 리듬을 만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걸 느꼈어요."



자리를 만들어내는 기술


돌이켜보면, 그 면접에서 나는 이미 그 조직의 전략총괄로서 일하고 있었다. 질문을 통해 조직을 진단하고, 경청을 통해 리더의 고민을 파악하고, 해석을 통해 현재의 위치를 재정의하고, 제안을 통해 미래의 가능성을 그려 보였다.


나는 스스로를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조직을 구조화하고,
리더의 시야를 해석하고,
자신을 전략적 파트너로 위치시킬 수 있는
질문을 던졌다.


그 질문들은 말이 아니라 구조를 설계했다. 그 구조 위에서만 공감과 해석, 그리고 제안이 의미를 얻는다.

면접이 아니라 하나의 대화. 선택을 구하는 자리가 아니라, 함께 길을 설계하자고 제안하는 자리.


전략가는 그런 자리에서 질문으로 입장하고, 흐름으로 설득하며, 결국 리더의 언어 속에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낸다.



27년차의 깨달음


그 면접을 통과한 지 몇 달이 지났다. 지금 나는 그 조직의 전략총괄로 일하고 있다. 그리고 매일 깨닫는다. 면접에서 내가 던진 질문들이, 지금 내가 이 조직에서 하고 있는 일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을.


결국 면접은 예행연습이었다. 전략총괄이 되어서 할 일을, 면접장에서 이미 시작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전략가가 면접에서 이기는 방식이다.


질문으로 입장하되, 흐름으로 설득하고, 대화로 자리를 만들어내는 것. 27년차가 되어서야 깨달은, 전략가의 진짜 무기는 바로 이것이었다.


"진정한 전략가는 답을 가지고 들어가지 않는다.
올바른 질문을 가지고 들어가서, 함께 답을 만들어낸다."

1524851831053?e=2147483647&v=beta&t=LWRVQsR5maaoA6diW83Xiv_tt_z7zGbZDUuMMgmhAq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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