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가는 방향이 아니라 길을 설계한다
전략 없는 조직은 없다. 그러나 실행되는 전략은 드물다. 특히 중견그룹에서 창업세대가 퇴장하고, 후계자가 리더십을 이어받는 전환기에는 전략이 유령처럼 떠다닌다. 그럴듯한 중장기 비전, 세련된 PPT, 정기적으로 열리는 전략회의는 존재하지만, 누구도 "이 전략은 우리의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전략은 존재하지만, 주인은 없다. 그리고 주인이 없는 전략은 조직을 움직이지 못한다.
나는 수차례, 전략실 내부의 우수한 보고서들이 임원회의를 통과하자마자 책상 서랍에 잠기고, 현장은 여전히 과거의 관성대로 움직이는 장면을 목격해 왔다. 종이에 담긴 전략과 조직의 움직임 사이에는 실체 없는 단절이 존재한다. 이 단절을 메우지 못하는 조직은 전략을 갖고 있으면서도 전략적으로 움직이지 못한다.
전략은 방향이 아니라, 의지의 구조화다. 방향을 향한 공통의 뜻과 결단이 구조 속에 뿌리내릴 때, 조직은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리더의 철학이 불분명하거나, 조직이 누구의 뜻을 따라야 하는지 헷갈릴 때, 전략은 종이에 갇힌 채 방치된다. 중견그룹의 세대교체기에는 이 같은 '전략의 유령화' 현상이 필연처럼 등장한다.
많은 중견그룹이 세대교체기를 맞아 리더십 공백을 경험한다. 전환은 표면적으로는 성공한 듯 보인다. 지분 정리는 완료되었고, 후계자는 지주회사의 대표이사 자리에 올라 있다. 외부에는 ESG, AI, 바이오 등 시대 흐름에 맞는 키워드 중심의 전략이 선포되고, IR 문서에는 야심 찬 성장 비전이 담겨 있다. 그러나 내부는 혼란스럽다. 전략의 설계자는 누구이고, 의사결정의 기준은 무엇이며, 각 사업의 우선순위는 어떻게 정해졌는가에 대해 명확한 답을 아는 이가 없다.
첫 번째 착각은, 전략은 지주사가 통제하면 된다는 믿음이다. 지분율, 이사회 구성, 인사권을 바탕으로 자회사를 지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통제의 환상이다. 전략은 물리적 지배가 아니라, 의미의 설계로 작동한다. 지주사가 투자 타이밍을 조율하고, CEO를 교체한다고 해서 자회사의 전략적 방향이 자동으로 조정되는 것은 아니다. 조직 구성원은 지분율이 아닌 철학에 반응하고, 명령이 아닌 비전에 따라 움직인다.
두 번째 착각은, 전략실이 전략을 짜면 실행은 따라온다는 믿음이다. 전략실은 그룹 전체를 조망하고, 다양한 인사이트를 수집하며, 외부의 변화를 예민하게 분석한다. 그러나 전략실이 만든 전략이 조직 전체에 '내재화'되지 않으면, 그 전략은 실행력을 가질 수 없다. 실무진은 그것이 경영진의 의지인지, 단지 자료용 문서인지 구분하지 못하고, 결국 전략은 실천이 아닌 장식으로 전락한다.
세 번째 착각은, 후계자는 자연스럽게 전략을 품게 된다는 믿음이다. 후계자가 물려받은 것은 권한이지, 철학이나 언어가 아니다. 조직을 이끄는 전략은 '누가 말했는가'보다 '무엇을 어떻게 말하는가'에 달려 있다. 전략 언어가 불분명할 때, 조직은 방황한다. 전략은 말이 아니라 말의 구조, 곧 리더의 철학을 조직의 언어로 번역한 설계물이 되어야 한다.
27년간 여러 조직의 세대교체를 지켜본 경험으로 말하자면, 가장 치열한 전투는 회의실에서 벌어진다. 그것은 소리 없는 전쟁이다. 창업주가 물러난 자리에는 권력의 공백이 생기고, 그 공백을 둘러싸고 보이지 않는 힘겨루기가 시작된다.
첫 번째 전선은 창업세대 출신 임원들의 저항이다. 그들은 "우리가 이 회사를 키웠다"는 자부심과 함께, 새로운 전략에 대해 "검증되지 않았다"며 의구심을 드러낸다. 표면적으로는 협조하지만, 실제로는 과거의 방식을 고수하려 한다. 나는 한 임원이 후계자 앞에서는 "좋은 방향입니다"라고 말하고, 회의가 끝나자마자 팀장들에게 "이건 현실성이 없어, 일단 기존 방식대로 하자"고 지시하는 장면을 목격한 적이 있다. 이때 전략가는 딜레마에 빠진다. 직접 맞서면 조직 내 균열이 심화되고, 묵인하면 전략은 실종된다.
두 번째 전선은 자회사 CEO들의 독립성 추구다. 각 자회사는 나름의 시장 논리와 고객을 갖고 있고, 그룹의 통합 전략이 자신들의 현실과 맞지 않는다고 여긴다. 특히 수익성이 좋은 자회사일수록 "우리는 잘하고 있는데 왜 바꿔야 하나"라는 저항이 강하다. 그들은 그룹 차원의 시너지보다는 자회사의 생존을 우선시한다. 전략가가 협업을 제안하면, "리소스 부족"이나 "시장 상황"을 이유로 미루거나 거부한다. 더 교묘한 경우에는 형식적으로는 참여하되, 핵심 정보나 역량은 공유하지 않는다.
세 번째 전선은 후계자와 전략가 사이의 미묘한 긴장이다. 후계자는 자신만의 색깔을 내고 싶어 하지만, 동시에 실패에 대한 두려움도 크다. 전략가의 조언을 수용하면서도, 때로는 "나를 과소평가하는 것 아닌가"라는 의심을 품기도 한다. 반대로 전략가는 후계자의 미숙함을 보완하려 하지만, 지나치게 개입하면 "월권"으로 비춰질 수 있다. 나는 한 후계자가 중요한 투자 결정에서 전략팀의 반대 의견을 무시하고 밀어붙이다가 큰 손실을 본 사례를 지켜본 적이 있다. 그 이후 그 후계자는 전략팀을 더욱 불신하게 되었고, 전략가는 조언을 주저하게 되었다.
이런 갈등 상황에서 전략가가 생존하고 역할을 다하려면, 정면승부가 아닌 우회와 포용의 기술이 필요하다.
창업세대 임원들에 대해서는 '존중하되 격리하는' 전략을 써야 한다. 그들의 경험과 공로를 인정하면서도, 새로운 전략의 실행에는 젊은 인재들을 전면에 내세운다. 나는 한 조직에서 원로 임원들을 '자문위원회'로 격상시키고, 실무는 차세대 리더들이 담당하도록 구조를 재편한 경험이 있다. 원로들은 체면을 잃지 않으면서도, 실질적 영향력은 제한되었다. 중요한 것은 이 과정에서 후계자가 원로들을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존중하며 새로운 역할을 부여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다.
자회사 CEO들에 대해서는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활용해야 한다. 협력에 대한 명확한 인센티브를 제공하되, 비협조에 대한 페널티도 분명히 해야 한다. 예를 들어, 그룹 차원의 대형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자회사에는 우선적으로 투자 기회를 제공하고, 독자 행동을 고집하는 자회사에는 자금 지원을 제한하는 방식이다. 다만 이런 조치들이 '징벌'이 아닌 '자연스러운 우선순위 조정'으로 받아들여지도록 세심하게 포장해야 한다.
후계자와의 관계에서는 '조언자'가 아닌 '참모'의 역할에 집중해야 한다. 후계자의 의견을 먼저 듣고, 그것을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조언을 제공한다. 설령 후계자의 판단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더라도, 직접적인 반박보다는 "그 방향으로 가려면 이런 점들을 보완해야 할 것 같습니다"라는 식으로 우회적으로 접근한다. 때로는 외부 전문가나 성공 사례를 활용해서 후계자가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유도하기도 한다.
창업세대가 조직을 이끌던 시기에는 전략이 곧 사람의 언어였다. 창업주는 스스로 전략이었고, 그의 말 한마디가 곧 결단이었다. 그러나 세대가 바뀌면 그 언어는 더 이상 조직 전체를 관통하지 못한다. 말이 전해지지 않을 때, 전략가는 단지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방향으로 걸을 수 있는 '길'을 설계해야 한다. 그것이 CSO의 본질적 역할이다.
역사에서 우리는 그런 전략가들의 흔적을 본다. 주공은 어린 왕을 대신해 나라의 제도를 설계하고, 새로운 질서를 정착시킨 뒤 물러났다. 장량은 유방의 무모한 의지를 설득 가능한 전략으로 바꾸어 황제를 만들었다. 이들은 왕이 되지 않았지만, 왕이 제대로 설 수 있도록 구조를 만들었다. 전략가는 왕이 아니다. 그러나 왕이 중심을 잡기까지, 중심을 대신 설계하는 자다.
현대의 CSO도 마찬가지다. 그는 후계자의 철학을 조직의 전략 언어로 번역하고, 자회사와의 전략적 연대를 설계하며, 전략 실행이 자연스럽게 일어날 수 있는 구조적 기반을 만든다. 다시 말해, 전략가는 구조의 설계자이며, 의미의 조율자다. 그가 하는 일은 커다란 구호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조직이 전략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도록 '운영의 지형도'를 설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전략가는 외로움을 감수해야 한다. 갈등의 한복판에서 중재자 역할을 하다 보면, 모든 편에서 미움을 받기 쉽다. 창업세대에게는 변화의 촉진자로 경계받고, 후계자에게는 간섭자로 여겨지며, 자회사 CEO들에게는 통제자로 인식되기도 한다. 전략가는 이 모든 시선을 견뎌내면서도, 조직 전체의 미래를 위해 때로는 냉정한 결단을 내려야 한다. 그것이 27년간 이 길을 걸어온 나의 솔직한 고백이다.
전략은 종이 위에서 태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리더의 마음속에서 자라고, 구성원의 확신 속에서 실행된다. 리더십의 공백기, 전략은 실종되기 쉽다. 그러나 그때야말로 전략가가 필요하다. 전략가는 길을 설계하고, 그 길 위에 의미를 새긴다. 조직이 중심을 회복하고, 다시 나아갈 수 있도록 조율하는 존재. 바로 그가 세대교체기의 전략가다.
그는 왕이 아니다. 그러나 왕이 길을 잃지 않도록 돕고, 조직이 방향을 잡을 수 있도록 설계하며, 갈등 속에서도 균형을 잡아준다. 때로는 미움을 받으면서도, 조직의 미래를 위해 어려운 결정을 내린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조용히 자리를 비운다. 그런 자가 있다면, 조직은 흔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전략은 살아 움직인다.
세대교체의 격랑 속에서, 진정한 전략가는 항해사와 같다. 폭풍우가 몰아쳐도 나침반을 놓지 않고, 선장과 선원들이 갈등할 때도 배가 침몰하지 않도록 균형을 잡는다. 그의 존재가 있기에, 조직은 새로운 시대로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