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을 누르던 삶에서 감성을 즐기는 삶으로

27년차 전략가의 사색

by 도진

감정을 전략으로 눌러온 시간들


나는 오랜 시간 전략의 언어 안에서 살아왔다. 사람과 시장, 조직과 미래를 읽어내는 일. 그 과정에서 나의 감정은 대부분 '보류'되었다. 무엇이 옳은가 보다는 무엇이 작동하는가를 먼저 따졌고, 어떻게 느끼는가 보다는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에 집중했다.


동료가 억울하게 해고당하는 상황에서도 "회사의 전략적 선택"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직원들의 야근이 일상화되어도 "경쟁력 확보를 위한 불가피한 과정"이라고 합리화했다. 내 마음 한편에서는 "이게 맞나?" 하는 목소리가 울렸지만,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판단이 흐려질까 봐 일부러 외면했다.


감정은 나에게 사치처럼 느껴졌다. 판단과 균형, 객관성과 냉정이야말로 나를 지켜주는 기술이었기에, 감정을 억누르는 일은 살아남기 위한 전략의 일부였다. 나는 늘 중심에 있었지만, 정작 내면은 침묵 속에 있었다.


그런데 작년 봄, 변곡점이 찾아왔다. 회사에서 진행하던 구조조정 프로젝트를 마무리하고 집에 돌아가는 길이었다. 지하철에서 우연히 앉은자리 맞은편에 한 아이가 아버지에게 그림책을 읽어달라고 조르고 있었다. 아버지는 피곤해 보였지만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책을 펼쳤다. 그 순간, 내 가슴 어딘가가 뭉클해졌다.


그날 밤, 나는 오랜만에 울었다. 무엇 때문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뭔가 오래 막혀있던 것이 터지는 느낌이었다. 그것이 억제의 질서가 균열을 내기 시작한 첫 신호였다.



감성이 다시 말을 걸어온 순간들


그 이후 나는 예전보다 더 자주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심코 보던 영화에서 주인공이 아버지와 마지막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카페에서 들리는 직원의 "오늘도 수고 많으셨어요"라는 인사에서 뜻밖의 따뜻함을 느꼈다. 퇴근길 골목에서 풍겨온 누군가의 저녁 준비 냄새에 문득 어머니가 해주시던 된장찌개가 그리워졌다.


예전에는 눈물이 나려고 하면 "왜 이런 걸로 울어?"라며 감정 자체를 부정했다면, 지금은 "아, 내가 이런 것에 마음이 움직이는구나"라고 생각한다. 감정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과 함께 살아가는 것. 어쩌면 이것이 나이가 들면서 배우게 되는 또 다른 지혜인지도 모르겠다.


어느 날 지인이 물었다. "요즘 많이 달라진 것 같은데, 무슨 일 있어?"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 "감정을 피하지 않게 된 것 같아." 그러자 그가 웃으며 말했다. "그게 어른이 되는 거 아닐까?" 그 말이 한동안 마음에 머물렀다. 정말 그런 걸까.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이 진짜 어른이 되는 일일까.


감정은 순간이지만, 감성은 그 순간을 품는 나의 태도다. 삶이 빠르게 흐를수록, 감성은 더 귀해진다. 예전 같으면 '효율성'이라는 이름 아래 스쳐 지나갔을 감각들, 이제는 그 위에 잠시 머물고 싶어진다.



"아직 늙지 않았구나"라는 역설적 깨달음


요즘 나는 자주 이렇게 느낀다. "아직 늙지 않았구나." 하지만 그 말의 바닥에는 묘한 역설이 있다. 이미 늙었음을 인지한 자만이, 늙지 않았다는 사실에 감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대학 동창 모임에서 한 친구가 말했다. "나이 들면서 뭔가 둔해지는 것 같아. 예전처럼 가슴 뛰는 일이 없어." 그 말을 들으며 나는 정반대의 경험을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나는 오히려 예전보다 더 많은 것들에 마음이 움직이고 있었다.


젊음은 속도의 문제였지만, 지금은 밀도의 문제다. 20대 때는 감정이 쏟아졌다. 거칠고 직접적이었다. 사랑도, 분노도, 좌절도 모든 것이 격렬했다. 지금은 감정이 천천히 스며든다. 깊고 오래 머문다. 그리고 그 스며듦을 인지하고 곱씹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이 감성이야말로 젊음의 진짜 흔적이라 생각하게 된다.


늙지 않았다는 말은, 아직도 무언가에 설렐 수 있고, 느낌을 기억할 수 있으며, 그 느낌에 따라 마음이 움직인다는 뜻이다. 감정이 아니라, 감성이 살아 있다는 자각. 그게 중년 이후의 젊음이다.



감성을 품는 삶의 의미


나는 여전히 전략의 언어로 세상을 본다. 그러나 이제는 그 전략의 지형 위에 감성이라는 또 다른 언어를 얹고 싶어진다. 내 삶의 리듬이 바뀌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더 이상 '계획'만으로는 살아내고 싶지 않다.


얼마 전, 회사에서 후배가 실수를 해서 프로젝트가 지연되었다. 예전 같으면 "왜 그런 실수를?"라고 따졌을 텐데, 그날은 먼저 "많이 당황스러웠겠어요"라고 말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 한마디가 상황을 어떻게 바꾸었는지, 후배의 표정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지켜보면서, 감성이 단순한 부드러움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감성을 즐긴다는 것은, 방종이나 무계획이 아니라, 삶의 결을 더 섬세하게 느끼겠다는 의지다. 감정이 다녀간 자리에 의미를 남기고, 그 의미를 삶의 언어로 녹여내는 과정이다.


이제 나는 감정을 억제하기보다, 그 감정이 내 안에 머무를 수 있는 여백을 만들고 싶다. 감성은 전략이 닿지 못하는 자리에서 삶을 다시 살아보게 하는 또 다른 내비게이션이다. 어쩌면 지금은, 조금 더 나를 허용해도 괜찮은 시간인지도 모르겠다.


때로는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마음이 먹먹해지기도 하고, 어떤 날은 거리에서 들리는 음악에 걸음을 멈추기도 한다. 삶의 미세한 흔들림이 내 안에서 울리는 순간들이 찾아온다. 그건 단지 피곤함이나 회고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오래 눌러두었던 감정의 잔향이, 다시 삶의 전면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신호다.


감성을 즐기는 삶은 단지 부드러워지는 것이 아니라, 더 정밀하게 살아가는 일이다.



에필로그


이제 나는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마음이 흔들릴 수 있는 사람이 되었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이 나를 인간답게 만드는 마지막 감각이라 믿는다.


감정을 누르던 삶은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지만, 감성을 즐기는 삶은 나를 조금 더 부드럽고 따뜻하게 만든다. 그리고 나는 이제, 그 따뜻함을 선택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는 것이 참 다행스럽다.


27년차 전략가로서 나는 여전히 숫자와 논리, 계획과 목표를 다룬다. 하지만 이제는 그 모든 것들 사이사이에 감성이라는 여백을 두고 있다. 그 여백이야말로 삶을 삶답게 만드는 공간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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