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년차 전략가의 사색
눈을 떴다. 창밖은 여전히 어두웠고, 방 안엔 새벽의 정적이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 익숙한 침구와 낯익은 공기 속에서, 나는 여전히 꿈의 여운 속을 헤매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나는 하얗게 눈이 쌓인 겨울의 골목길을 걷고 있었고, 그 길 어귀에서 한 사람을 만났다. 그는 예전 어느 시절, 함께 시간을 보냈던 사람이었고, 꿈속에서의 모습은 당시보다 훨씬 말갛고 차분했으며, 마치 내 안에 잠들어 있던 어떤 기억이 시간의 표면을 뚫고 조용히 떠오른 듯한 느낌을 주었다.
우리는 말없이 걷다가, 잠시 걸음을 멈춘 그가 문득 내게 물었다.
“요즘, 어떤 길을 걷고 있습니까.”
그 문장은 짧았지만, 이상할 만큼 낯설고도 깊이 박혔고, 나는 꿈속에서도 쉽게 대답하지 못한 채 그저 눈 밟는 소리만 따라 걷고 있었다. 깨어난 지금까지도, 그 물음은 여운처럼 내 안에 남아 맴돌고 있다. 나는 지금, 과연 어떤 길을 걷고 있는 것일까.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듯하지만 가끔은 제자리걸음을 반복하는 기분, 익숙한 길인 줄 알았지만 낯설게 다가오는 방향감각의 어긋남, 꿈은 어쩌면 내가 애써 외면하고 있던 질문을 아주 조용한 방식으로 건네는지도 모른다.
꿈속의 그는 현실에서 분명히 한 시절을 함께 지나온 인물이었지만, 그날의 그는 과거보다도 더 담백하고 단정했으며, 마치 내가 되지 않은 또 다른 ‘가능성의 나’처럼 느껴졌다. 겉모습은 그였지만, 그가 던지는 말과 태도는 어딘가 나의 내면과 닮아 있었고, 그래서 그 짧은 만남이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에게 말을 거는 방식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의 어느 시점에서 우리는 수많은 선택을 하고, 그 선택의 결과들이 지금의 자리를 만들어낸다. 그런데 아주 가끔,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길, 혹은 선택했지만 스스로도 납득하지 못했던 길들이 무의식의 영역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내며 질문을 던진다.
“이 길이 정말 네가 원하던 방향이었는가?”
“지금의 너는, 그 시절 네가 기대하던 너인가?”
그와의 눈길 속 대화는 단순한 과거 회상의 재현이 아니라,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와 조용히 마주 앉는 순간이었다. 그것은 회피하거나 무시할 수 없는 정직한 응시였고, 현실이라는 바쁜 흐름 속에서 잠시 잊고 지냈던 ‘나는 누구이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다시 나를 찾아온 방식이었는지도 모른다.
평소처럼 나는 이 꿈의 의미를 AI에게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왜 이런 꿈을 꾼 걸까요?” “과거의 인물과 다시 만나 대화를 나누는 꿈은 어떤 의미가 있나요?”
AI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렇게 답했다.
“이런 유형의 꿈은 흔히 인생의 전환점이나 내면의 깊은 성찰이 필요한 시기에 나타나는 상징입니다. 꿈에 등장한 인물은 당신의 기억에서 비롯된 존재이지만 동시에 당신 안의 또 다른 자아, 또는 당신이 한때 지향했던 가치나 역할을 상징할 수도 있습니다.”
나는 그 말을 곱씹으며, 다시 물었다. “그가 제게 ‘지금 어떤 길을 걷고 있냐’고 물었는데, 그건 결국 제가 제게 던진 질문이겠지요?”
이번에도 AI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종종 가장 중요한 질문을 타인의 목소리나 형태를 빌려 스스로에게 던집니다. 특히 꿈에서는 그 모든 주체가 결국 당신 자신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랫동안 마음에 남았다. 나는 어쩌면 지금, 명확하지 않은 미래와 스스로 설정한 방향 사이에서 새로운 가능성과 그에 따르는 책임을 조용히 직시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불확실한 여정을 시작하기 전, 내 마음은 그렇게 꿈이라는 장치를 통해 스스로에게 마지막 확인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요즘의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조용히, 그러나 진지하게 다음 장을 준비하고 있다. 눈에 띄는 움직임보다는 보이지 않는 수면 아래에서 천천히 방향을 다듬고, 오래된 역량들을 다시 꺼내어 닦고 있으며, 어쩌면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걷기 위한 내면의 설계를 진행하고 있는 셈이다.
그 여정에는 명함도, 직함도, 정해진 승강장이 없고, 그저 내가 어떤 질문을 품고 있고, 어떤 의미를 좇고 있는지가 방향을 결정한다. 한 시절의 관성에서 벗어나 새로운 궤도를 그리는 이 과정은 그리 화려하지 않지만, 묵직한 자기 확인의 시간이다.
꿈은 그런 나에게 조용히 물었다.
“당신은 누구이며,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 질문 앞에서 나는 더 이상 회피하거나 둘러대지 않기로 했다. 정답은 아직 없지만, 내가 찾고 있는 질문만큼은 진심으로 마주하고 싶다. 그날의 눈길을 함께 걸었던 그에게, 그리고 그를 닮은 내 안의 또 다른 나에게 언젠가 이렇게 말할 수 있기를 나는 바란다.
“나는 지금, 내가 정한 길을 걷고 있습니다.
때로는 느리지만, 의식적으로, 그리고 진심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