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단수가 아니다.

포스트모던 자아란?

by 혜성

저는 웹소설을 보기 시작한 지 어언 10년이 되어갑니다.

하루에 평균 3시간 정도를 볼 정도로 웹소설에 빠져있는 생활이였습니다.


웹소설이라고 함은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그런 것들이 맞습니다.

이 세계 판타지물, 학원물, 회귀물, 아포칼립스물 등, 문학이라기보단 휘발성 재미를 위한 소설들을 주로 봐왔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웹소설 안에도 잘 찾아보면 철학이 있고, 작가의 깊이가 담겨 나오는 작품들이 분명 존재합니다. 저는 그러한 작품을 사랑합니다. 그런 작품들로 인하여 지금의 제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되며, 저는 저를 사랑합니다.


웹소설이라는 프레임 속에 갇혀있는 작품들을 소개하고, 제가 그 작품에서 어떠한 것을 배웠는지 여러분에게 설명드리고자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웹소설, 애니, 만화, 웹툰, 책, 영화 등 이러한 장르는 그릇입니다. 창작자가 작품을 담는 그릇이죠. 그 안에 어떤 작품이, 어떤 깊이가, 인사이트가 들어있을지는 모르는 일입니다. 그릇의 모양이 별로라고 안에 담겨있는 작품이 평가절하당하는 것은 매우 슬픈 일이죠.


그러므로 웹소설 마니아인 제가 즐겨보고, 깊은 인사이트를 줬던 작품, 문장, 깊이 등을 저에게 감동을 준 순간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웹소설로 배우는 인생 시작하겠습니다.


장르소설의 근본이자 많은 웹소설의 아버지다.


'나는 단수가 아니다.'


장르 소설로 시작했지만 이제는 문학이 되어버린 이영도 작가님의 드래곤 라자라는 소설입니다.


많은 분들이 장르소설을 이 작품으로 시작할 정도로 교과서가 되어버린, 심지어 교과서에도 실렸던 작품입니다.


이 작품에서 많은 희노와 애락을 느낄 수 있지만 제 기억에 가장 남는 것은 '나는 단수가 아니다.'라는 철학적 내용입니다.


아래는 작품에서 가져온 발췌문입니다.


"드래곤 로드께서는 샌슨에게 이렇게 질문하셨지요. '샌슨의 가족들을 죽이겠는가, 샌슨을 죽이겠는가.' 조금 달랐을지 몰라도 대충 그런 의미였지요. 하지만 그건 나눌 수 없어요.".


"어째서지?"


"샌슨은 하나가 아니니까. 샌슨은 헬턴트의 경비대장 샌슨이고, 나의 좋은 동료 샌슨이고, 샌슨의 아버지 조이스 씨의 사랑하는 장남이에요. 칼의 신뢰받는 길앞잡이고, 그리고 그 아가씨에게는 사랑하는 연인인 샌슨이에요.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샌슨이지요. 이런 식의 이야기도 들어보셨겠지요? 어쨌든 당신은 샌슨 하나를 살려주는 대신 그 가족들을 죽이겠다고 말했지만, 그 가족들을 죽이면 샌슨도 죽는 셈이에요."


난 주먹을 꽉 쥔 채 말했다. 이마에 열기가 올라 쓰러질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도저히 말을 멈출 수가 없다.


"그래요. 그 모든 것이 샌슨이에요. 당신이 헬턴트 영지를 파괴하면 헬턴트의 경비대장 샌슨은 죽는 셈이에요. 당신이 날 죽인다면 후치의 동료 샌슨을 죽이는 셈이고요. 당신이 조이스 씨를 죽인다면 조이스 씨의 아들인 샌슨은 죽는 셈이에요. 당신이 칼을 죽인다면 칼의 길앞잡이 샌슨이 죽지요. 그리고, 그리고 그 아가씨를 죽인다면 그 아가씨의 연인인 샌슨을 죽이는 셈이라고요."


"샌슨은 하나가 아닌가?"


난 기가 막혀서 고함을 빽 질러버렸다.


"하나가 아니에요! (중략) 나라는 존재가 아무리 남아있어도 다른 사람들이 모두 잊어버리게 되면 그 사람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아직까지 그걸 모르세요? '나'라는 것은, 나라는 것은 이 몸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요. 다른 사람들에게, 다른 모든 것들에 다 내가 있어요. 그것이라고요! 그 모든 것을 모았을 때 내가 있는 거라고요. 우리는 그렇게 살아요, 그것이 인간이에요!!"


위 내용처럼 '나'라는 사람을 정의하는 것은 나 개인의 주관뿐이 아니라, 나를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 내면에도 개개인의 다면성으로 기억되고 남아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단순히 생물학적인 개체가 아닌 사회적인 관계의 총합으로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의미이죠.


우리는 당연하게도 사회적 동물입니다. 타인에 의해 존재를 증명하는, 증명당하는 순간이 많죠. 여기에는 그 누구도 반대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자신이 자신만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하는 성현들도 결국은 후대에 기록되고 해석됨으로써 더욱 우리에게 각별한 의미로 다가오게 됩니다.


여러분이 지금 죽는다고 하여도 여러분 모두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을 것입니다. 제 죽음이 저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한들 저를 기억해 주는 사람들에게는 각자의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희는 삶을 소중하게 생각하게 되며, 그 삶 동안에 불꽃처럼 살아가게 됩니다. 사는 것의 의미는 멀리에도 있지만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죠.


우리는 항상 타인에게 존재하고 싶은 마음을 품고 살아갑니다. 대표적으로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이 있을 것이고, 회사에서 모든 것에 초연한 만년 과장님도 그 초연함으로써 존재하고 싶은 마음이 분명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살아가는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최근 유행하였던 '진격의 거인'에도 비슷한 대목이 있었죠. 엘빈이라는 등장인물이 항거 불가능했던 적에게 병사들을 보내며 했던 대사입니다.


아무리 꿈과 희망을 가지고 있어도,

행복한 인생을 보냈다 해도,

바위에 깔려 죽는 대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언젠간 죽는다.

그렇다면 인생에는 의미가 없나?

애초에 태어난 것에 의미 따윈 없는 건가?

죽은 동료들도 그런가?

그 병사들도 무의미했던 건가?


그 병사들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건 우리다!

그 용감한 전사자를, 가엾은 전사자를 기억해 줄 수 있는 건 살아있는 우리들이다!

우리들은 여기서 죽음으로써 다음 사람들에게 의미를 맡긴다!

그것이 유일하게 이 잔혹한 세계에 저항하는 방법이다!

이 장면에서 마음에, 온몸에 전율이 돌았다.


이처럼 개인은 죽어도 남아있는 사람들에게는 각자의 의미로 개인이, 죽음이 마음속에 자리 잡게 됩니다. 이것은 알베르 카뮈가 말했던 무의미에 대한, 부조리에 대한 반항과도 같은 내용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사람이라는 종족만이 개념과 현상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으로 추억하며 살아갈 수 있죠.


그렇기에 우리는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의미를 자신에게 담으려 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의미를 남겨두려 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가장 상위 욕구인 자아실현의 욕구입니다. 우리는 항상 존재로서 증명하고자 합니다. 타인이던, 세상이던.




포스트 모던 자아라는 건 무엇인가.


저는 드래곤라자의 샌슨 퍼시발처럼 회사에서는 회사에서의 나, 집에서는 집에서의 나, 친구들 사이에서의 나, 가족들 사이에서의 나 와 같이 많은 페르소나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제 몇 안 되는 장점 중의 하나는 상대에게 맞춰 새로운 가면을 깎아내어 기준을 맞출 수 있죠. 그게 어린아이를 놀아주는 일 일수도, 나이가 지긋하신 어르신의 말동무를 하는 일 일수도 있죠.

저는 모든 대화상대에게서 대화가 잘 통한다는 느낌을 분명 줄 수 있을 정도로 본연의 나보단 상대의 나를 보여주는 일에 익숙합니다. 물론 그게 단점이 되는 상황도 분명 있죠.


어린 시절에는 이러한 제 페르소나 때문에 혼란을 겪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자아를 탐구하던 질풍노도의 사춘기였죠. 그때에는 매번 다른 저를 마주하며 '어떤 게 진짜 나이지?', '내 진짜 성격과 본질은 뭘까?'라는 혼란을 마주하고 지냈던 적이 있습니다. 다들 이러한 시간을 보내오지 않았을까요? 자아를 형성하던 어린 시절에 말입니다.


하지만 드래곤라자라는 작품을 마주하고, 위 내용을 보고 나니 '그 모든 것이 나는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상대에게 맞는 가면을 쓰는 저 자신을 오히려 긍정하고 장점으로 바라볼 수 있었죠. 그러함으로써 저는 제 모든 것을 인정하고 부정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전까지는 자신의 자아라는 것이 없고 그저 타인에게 맞춰진 삶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후의 심리학책에서 본 포스트 모던 자아입니다.


제 모든 페르소나를 인정하고 사랑하여 자신의 모든 면을 긍정해 주는 것. 자신의 자아를 해체시켜 세상에서 벗어나는 것. 미셸 푸코가 주장했던 자아 해체론과 맞닿아있었죠.


20세기 프랑스 역사학자, 사회이론가-미셸 푸코(강단있게 생겼다.)

여러분도 여러 상황 속에서의 자신이 있을 것입니다. 가정에서는 차가운 아버지여도 회사에서는 꼼꼼한 상사일 수 있는 것처럼요. 사람은 언제나 상황에 맞게끔 새로운 가면을 쓰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 속에서 자신을 조금씩 조금씩 표현하며 그 간극 사이에서의 긴장감을 안고 살아간다고 생각됩니다. 사람은 항상 나로서 존재하려 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 실격에서 요조는 자신으로 존재하지 못하였기에 인간실격이라고 하였듯. 페르소나 위에 아래에 언제나 자신이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그 가면을 벗지 못한다면 그 가면마저 사랑해 보는 건 어떨까요? 가면이 있는 이유는 자신을 지키기 위함이니까.


감사합니다.




세상과 나의 경계 - (월 발행)

웹소설로 배우는 인생 - (수 발행)

세상과 나의 경계 - (금 발행)

keyword
작가의 이전글하루를 깔끔하게 마무리하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