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자의 시간

죄책감에 대하여

by 수하

나는 아이에게 큰 관심이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20대의 나는 내가 아이를 좋아하는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지금 열여섯 살이 된 첫 조카가 태어나기 전까지, 나는 아이를 ‘좋아한다’는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 시절 나는 밤낮없이 일했고, 첫 조카가 태어나고 나서는 한 달에 두어 번쯤 조카가 보고 싶어 다섯 시간을 달려가곤 했다. 그렇게 처음으로 ‘아이라는 존재가 주는 기쁨과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둘째 조카가 태어났을 때 나는 임신 중이었다. 그래서인지 비교적 큰 관심을 주지 못했다. 첫 조카만큼 사랑을 쏟지 못한 것이 늘 미안하고 고마운 그 아이는, 지금 내 아이에게 둘도 없는 존재가 되었다. 지금의 내 언니가 나에게 그러하듯이.


두 아이를 어렵게 품었던 그는 소위 ‘계획에 없던’ 막내를 낳았다. 그때 내가 가장 먼저 했던 말은 “힘들어서 어떻게 하려고 그래”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도대체 내가 무슨 자격으로 그 말을 했을까. 이 소중한 생명이 얼마나 큰 기쁨을 줄 수 있는지, 내가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했을까. 나의 죄책감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그에게 첫째 아이는 5년 만에 얻은 아이였다. 집안의 첫 아이라서 그런지 주변 사람들의 사랑과 관심을 한껏 받았다. 둘째 아이는 양수 문제로 출산 직전까지 고생했고, 태어나서는 눈 건강이 좋지 않아 힘든 시기를 보냈다. 첫째가 열 살, 둘째가 여섯 살이 되었을 무렵이었다. 아이들이 조금씩 유아기를 벗어나던 그때, 복동이가 찾아왔다.


복동이는 싫어하는 게 없는 아이였다. 세상 모든 것을 사랑하는 아이였다. 돌이켜보면 신기할 만큼, 다른 두 아이와 달랐다. 가리는 것 없이 잘 먹어서, “앞의 둘이 안 먹은 걸 셋째가 다 갚아주는 거다”라며 웃곤 했다. 그가 두 아이 때문에 속상해 울던 날이면, 복동이는 슬며시 휴지를 가져와 엄마의 눈물을 닦아주던 사랑스러운 막내였다.


첫째 아이는 이른 사춘기에 접어들었고, 둘째 아이는 기질적으로 예민했다. 터울이 큰 세 아이를 키우며 그는 심신이 피곤했을 것이고, 웃음은 점점 줄어들었다. 매일의 전쟁 속에서도 ‘남들도 다 이렇게 살겠지’라고 여겼다. 소중한 하루가 그렇게 가버리는지 알지 못했다. 그렇게 우리는 영원히 살 줄 알았다.




4년 8개월의 흔적은 어디에나 남아 있었다. 그리 크지 않은 지방 도시였기에, 이사를 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놀이터에도, 식당에도, 근처 바닷가에도 복동이의 기억이 스며 있었다. 단지 안을 지나는 유치원 버스만 봐도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렇게 가슴이 땅속으로 꺼져버리는 날들이 반복되었다. 그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고, 어디에도 가지 못했다. 그는 자식을 잃은 죄인이었다.


나는 그들의 삶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한동안 술과 약으로 버텼다. 술을 먹거나, 약을 먹거나, 술과 약을 함께 먹거나. 혹은 그냥 죽은 듯이 잠들어버리거나. 형부는 공황장애가 생겨 조퇴하거나, 출근조차 못 하는 날이 잦았다. 사람들과 눈이 마주치면 눈물이 흐른다고 했다. 첫째 아이는 밖에서 친구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늘었고, 늦은 밤에나 귀가했다. 둘째 아이는 식사량이 줄고, 먹지 않으니 몸이 약해졌다. 체중이 눈에 띄게 줄었고, 면역력이 떨어져 두드러기가 나기도 했다.


그리고 어느 날, 형부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가 돌연 약을 끊겠다고 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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