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의 발톱] 8. 하브론 마법 학교의 잔치

그들은 국물을 끓이고 고기를 굽고 있었다

by 마봉

“릴카, 릴카, 리오란 선생님 얘기랑 감동적인 사랑얘기 해줘.”


매일같이 봉숭아밭으로 와서 졸라대는 용들에게 나는 이젠 더 이상 해줄 얘기가 없었다. 용들은 같은 얘기를 다시 해줘도 잘 들었지만, 세 번 이상 같은 얘기를 하면 지겨워했다. 할 얘기가 없다고 입을 다물어 본 적도 있었으나 그들의 실망으로 풀이 죽은 몽글몽글한 눈망울을 보고 있으면 무슨 얘기라도 해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매르윈 선생님과 게로스 임금님의 얘기를 시작했다. 그 얘기야 말로 내가 8살에 우리 학교에 들어온 이래 거의 매일같이 듣고 또 들어서 이제는 매르윈 선생님 본인만큼 잘 알고 있는 이야기가 아닌가? 매르윈 선생님의 게로스 임금님에 대한 애틋한 사랑얘기는 우리 학교 학생들이라면 모두 하나같이 진실한 사랑의 표본으로 삼고 있는, 사랑의 교과서와도 같은 스토리였다. 왜 처음부터 이 얘기를 해주지 않았던고.


사실, 매르윈 선생님이 칼베르 유학생활 중 파렌베르크 마법회당에서 일할 때 당시 왕자였던 게로스 임금님을 보고 첫눈에 반한 것은 맞지만, 두 분의 로맨스는 우리가 선생님의 얘기를 토대로 상상한 것들이었다. 학교에서 글 좀 잘 쓴다는 마야 스쿠그라는 아이가 두 분의 로맨스를 소설로 만들어 뿌렸는데 그 내용이 진짜 애달프고 가슴을 찢었다. 몇 주도 지나지 않아 그 소설의 내용은 정설로 굳어져 버렸다. 우리가 소설 속의 매르윈 선생님과 게로스 임금님 얘기를 하고 있으면 지나가는 다른 선생님들이 “얘들아, 그 임금님 진작 결혼하셨단다.”라고 넌지시 말하고 가곤 했다. 그러나 우리는 개의치 않았다.


자기 글이 인기를 얻자 마야 스쿠그가 후속 편을 써서 돌렸으므로 용들에게 해줄 이야기는 얼마든지 있었다. 용들은 왜 이런 얘기를 이제서야 해주냐며 눈을 반짝이며 모여 앉아 내 이야기를 들었다.


용들의 발톱은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자라났다. 봉숭아 재배도 성공적이었다. 마야의 소설 2부, 3부, 외전에 패러디까지 다 얘기해 버려서 더 이상 할 얘기가 없어지자 그때부터는 내가 멋대로 지어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삼류 소설도 이보다는 유치하지 않을 테지만 용들은 몽글몽글한 눈망울로 모여들어 내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난생처음으로 내가 거짓말을 지어내는 데 소질이 있음을 깨달았다. 나쁜 의도는 아니었다. 어쨌든 용들은 이런 얘기들을 무지하게 좋아했으니까.


나는 봉숭아를 가꾸고, 발톱이 자라나는 대로 잘라내어 봉숭아 염색단지에 담근 다음, 물이 잘 들면 꺼내어 말렸다. 봉숭아밭 곁에 지은 창고에는 로맨스 이야기를 듣고 발그레해진 용들의 얼굴만큼 붉게 물든 용의 발톱들이 차곡차곡 쌓였다.


계절이 다시 바뀌고, 마침내 100개째의 발톱을 봉숭아 염색단지에서 꺼내어 말리던 날, 나의 거짓말에 감동받은 용 몇 마리가 나를 따라 매르윈 선생님을 뵈러 가고 싶다고 나섰다. 마른하늘에 날벼락같은 소리였다.


“무슨 소리냐 올카푸카.” 용 선생님이 말했다. “우리 용들은 지난 이천 년 동안 이 섬을 떠난 적이 없다.”


“대마법사 매르윈 선생님을 만나 뵙고 가르침을 받고 싶어요.”라고 용들은 완강하게 말했다. 나의 얘기솜씨에 스스로 감탄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무, 무슨 가르침이야. 매르윈 선생님은 그냥 마법사이지 연애학 선생님이 아니라구!” 내가 외쳤다.


“그 말이 옳다, 올카푸카. 인간들에게 모습을 드러내면 안 된다고 장로님께서 누누이 말씀하시지 않았으냐?”


“인간들이 그렇게 위험한 존재인가요?” 내가 물었다. 용들도 인간들의 무자비함을 두려워하는 것일까? 고대의 전쟁에서는 인간과 용도 같이 싸웠다고 했다. 그때의 두려움을 아직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인간들처럼 작고 연약한 존재들이 우리처럼 큰 지성체를 보면 절망한 나머지 집단 자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절대 인간들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거란다.”


용 선생님의 이 같은 말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인간들이 너희 착해빠진 용들 따위는 가죽을 벗겨 귀부인들 가방을 만들 수도 있다는 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이 생긴 것만 보아서는 착하고 온순해 보이지 않는다는 것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선생님, 그러면 릴카를 데려다주고 근처에서 매르윈 선생님의 얼굴만 뵙고 오는 건 안될까요? 어차피 릴카도 이 짐 가지고 집에 돌아가려면 우리 도움이 필요할 거예요.”


그 말은 맞는 말이었다. ‘우트카르트’ 호의 선장이 나에게 구조요청에 필요한 숯과 약품을 주고 가긴 했지만, 그것도 근처에 지나가는 배가 육안으로 관찰이 되어야 쓸 수 있었다. 게다가 올 때와는 달리 나에게는 무거운 짐도 있었다. 새삼스럽게 다시 돌아갈 방법도 생각하지 않고 여기까지 온 것이 후회되었다.


“정 그렇다면 가까이는 가지 말고 멀리서 선생님을 뵙고 오너라. 알겠지 올카푸카, 리카치카, 그리고 샤카루카! 절대로 인간에게 위협을 가해서는 안 된다. 불도 내뿜지 말고, 과속비행을 해서 돌풍을 일으켜서도 안 된다. 릴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그분을 멀리서 뵌 다음 바로 돌아오도록 해라. 알겠느냐?”


용 선생님의 주의를 깊게 새기고 올카푸카와 리카치카와 샤카루카 세 마리의 용들은 출발 준비를 했다. 나는 다른 용들과 작별 인사를 했다.


“편지 해, 릴카.”


“편지를 쓰면 어떻게 배달하는데?” 내가 물었다.


“넌 마법사가 될 거잖아? 새와 마법을 이용해서 편지를 배달할 수 있지 않을까?”


그들은 또한 오스틴 대륙의 사막 건너편에도 용들이 살고 있다고 얘기해 주었다. 거리가 너무 멀어서 자주 왕래하지 않고 오백 년에 한 번 꼴로 대표단을 보내 교류한다고 했다. 리카치카는 다음번 교류에 드라코피요르드 대표로 오스틴에 가 보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내가 감히 말하건대, 세상에 용만큼 자비롭고 예절 바르고 친절한 동물은 없을 것이다.


나는 리카치카의 등에 타고, 나머지 두 용들에게 봉숭아물을 들인 용의 발톱 100개를 나눠 지게 한 다음 드라코피요르드를 출발했다. 그들은 날 수도 있으면서 드라코피요르드를 떠나본 적이 거의 없다고 했다. 그래서 용들은 하늘에서 내려다본 우리 스칼하븐의 수많은 섬들을 보고 무척 경이로워했다.


“땅조각이 대체 몇 개냐!” 용들이 감탄했다.


“섬이라고 해. 우리나라는 큰 섬만 7천 개가 넘어.”


나는 용들에게 아는 섬들을 가리키며 설명을 해 주었다. 그러는 사이에 벌써 하브론 마법학교가 있는 비에르달 섬이 저 멀리 보이기 시작했다. 아침에 출발해서 하루 종일 날아왔는데도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나와 용들은 사람들이 놀라지 않도록 조용히 학교 근처의 숲 속에 내렸다. 나무 사이로 학교를 바라보니 교장 관사, 그리고 교사관 바깥에 횃불이 걸려 있었고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무슨 행사를 하는지 물을 끓이는 큰 솥이 밖에 나와 있었고, 교사관 안뜰에는 숯과 나무를 엄청나게 쌓아 놓고 불을 지펴 고기를 굽고 있었다. 맛있는 냄새가 숲 속까지 풍겨왔다.


“오늘이 무슨 날인가?”


나는 용들에게 잠시 여기서 기다리라고 한 후 교사관으로 갔다. 선생님들은 교사관 마당에 야외 테이블과 의자를 갖다 놓고 잔치를 하고 있었다.


마당에 걸린 솥에는 국물이 가득 차 있었고, 그 안에는 말린 깡총날치송어 몇 마리가 끓고 있었다. 급식 담당 아저씨 아주머니들이 선생님들에게 그 국물에 국수를 말아 한 그릇씩 나눠주고 있었다. 숯과 장작이 높이 쌓인 모닥불 옆에는 무지개비늘 목도리도마뱀의 눈물이 담긴 병이 하나 놓여 있었다.


‘불 마법’ 선생님이 병을 열어 숯 위에 도마뱀의 눈물을 한 방울 떨어뜨렸다. 숯은 치이익 소리를 냈고 거기서 나온 흰 연기가 모닥불 위의 고기를 구름처럼 감쌌다. 숲 속까지 흘러오고 있는 맛있는 냄새는 이 고기 냄새였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이것들은 왜 다 여기 나와있는 거죠?” 나는 아무나 붙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마치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나의 귀중한 사랑의 묘약 재료들이 왜 잔치마당에 나와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야아, 릴카 아니냐!” 흰 수염과 백발의 ‘바람 마법’ 선생님이 나를 발견하고 큰 소리로 불렀다. “네 덕분에 잘 먹었다! 이렇게 시원한 국물은 처음 먹어보는구나!”


“국물이요?” 아직 얼떨떨한 채로 내가 되물었다.


“네가 가져온 거라며? 깡총날치송어 말린 것 말이다. 교장 선생님이 네가 구해왔다고 하셨다. 어찌나 시원한지 속이 아주 확 풀리는구나!”


“그건… 국물 끓이는 용도가 아니에요!” 내가 외쳤다. 그때 아까 숯에 도마뱀의 눈물을 떨어뜨리던 ‘불 마법’ 선생님도 나를 발견하고 반갑게 부르셨다.


“릴카야! 넌 대체 이렇게 귀한 걸 어디서 구해왔니?”


“오스틴에서요…” 내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런데 왜 그걸… 불에 넣어요?”


“이거 한 방울 숯에 떨어뜨리면 고기 구울 때 불맛이 아주 그만이란다. 오스틴 사람들은 이 맛을 몰라서 도마뱀이 있어도 쓸 줄을 모르더라고. 그런데 이 도마뱀 엄청 빨라서 잡기 힘들다던데, 넌 어떻게 눈물을 병째로 구해온 거냐?”


나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가 구해온 것은 사랑의 묘약 재료들이었다. 그런데 왜 선생님들은 그 재료를 가지고 국수를 끓이고 고기를 굽고 있는 것일까?


매르윈 선생님이 저만치에서 나를 발견하고 황급히 달려오셨다.


“아니 릴카야! 대체 어디 가 있었니? 네가 돌아온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오자마자 다시 어디론가 가 버렸다며?” 매르윈 선생님이 말했다.


나는 선생님의 로브 자락을 붙잡고 소리쳤다.


“매르윈 선생님!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제 사랑의 묘약 재료들이 왜 잔칫상에 올라와 있는 건가요?”


“오, 릴카, 사랑의 묘약 필요하냐?” ‘바람 마법’ 선생님이 국수를 한 그릇 더 받으러 가며 말씀하셨다. “네 덕분에 잘 먹었으니 내가 만들어 주마. 그런데 그건 뭐 하러? 어차피 효력은 1분이면 끝나는데.”


“1분… 이요?”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재료는요?”


“재료? 내 방에 가서 앵초꽃 말린 것 좀 가져다 주련? 금방 만들어 주마.”


“앵초꽃이요? 용의 발톱이 아니고요? 그리고 사랑의 묘약 효력이 겨우 1분이라고요?”


“뭐 더 길게 할 수도 있긴 한데, 법적으로 그 이상은 안 되잖니? 아무튼 네 덕분에 오랜만에 잘 먹었으니 내 당장 만들어 주마.”


“전 용의 발톱을 구하러 갔었어요…”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을 느끼며 나는 매르윈 선생님을 향해 말했다. “앵초꽃이라면 운동장에서도 자라는 거잖아요. 그리고 사랑의 묘약이 겨우 1분 지속된다는 얘기는 전 처음 들어요!”


“1분이 아니라 1년이어도 그런 건 만드는 게 아니야!” 매르윈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그럼 왜 구해오라고 하셨어요?”


“네가 도저히 말을 안 들으니 재료 구하기 어려운 걸 알면 포기할 줄 알고 그랬지 않겠니. 그리고 용의 발톱은 또 무슨 얘기냐?”


나는 그때까지도 가지고 있던 교장 선생님 책상 위에 있던 종이쪽지를 보여 드렸다. 선생님은 손으로 이마를 짚으셨다.


“넌 왜 그렇게 성질이 급하니! 이건 그냥 낙서잖아! 어딜 봐서 이게 너한테 용의 발톱을 가져오라는 얘기로 보이니!”


“하지만 사랑의 묘약이 겨우 1분이라는 얘기를 제일 먼저 하셨었어야죠!”


내 입에서 저절로 주문이 외워졌다. 용의 서식지로 찾아가면서 가파른 산을 오를 때 머리 위로 떨어지는 바위를 부수기 위해 외우던 주문이었다. 매르윈 선생님은 황급히 손을 들어 내 주문을 막았다. 선생님은 대마법사니까 그런 일쯤이야 숨 쉬는 것만큼 간단할 것이었다.


“저는 저 재료들을 구하기 위해 코코하임에도, 오스틴에도, 드라코피요르드에도 갔어요!” 내가 외쳤다. “죽을 수도 있는 곳에 일부러 저를 보내셨던 거죠! 게로스 왕자님 닮은 리오란 선생님을 저한테 주기 싫어서요!”


그 말에 매르윈 선생님 뒤쪽에 서 있던 리오란 선생님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나는 그제서야 리오란 선생님도 거기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미 모두 늦은 뒤였다.


“너는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니!” 매르윈 선생님이 외쳤다. “네가 없어져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느냐! 집에도 안 왔다고 하고, 친구들한테는 기다려 달라고만 하고 사라져 버리고! 어디 가는지 말이라도 하고 갔어야지!”


그때, 교사관 마당 위로 시커먼 세 개의 검은 그림자가 내리 덮였다. 용들이었다.


피스크누들라르(Fisknudlar)

종류: 국물 요리(면 요리)
원산지: 스칼하븐, 비에르달과 인근 지역
재료: 말린 생선(송어, 날치 등), 곡물가루로 반죽한 국수, 딜·소금·양파 약간

조리법:
1. 말린 생선을 오래 끓여 진한 국물을 낸다.
2. 거친 보리·호밀가루로 만든 국수를 넣고 함께 끓인다.
3. 마지막에 딜이나 바닷가에서 나는 허브를 넣어 풍미를 더한다.

맛: 담백하고 짭짤하며, 바닷바람 맞고 돌아온 어부들의 몸을 따뜻하게 녹여주는 맛.

문화적 의의:
긴 항해를 마친 어부들의 귀환 음식
큰 잔치에 빠지지 않는 대표 메뉴
학생들은 "공부하다 지치면 생각나는 음식"이라 부른다.

특수 변형:
말린 깡총날치송어를 넣으면 국물이 훨씬 시원해져 상급 버전으로 취급된다.
직화로 구운 고기를 곁들이기도 한다.

◆Illustrations by Mabon de Forêt (AI-assis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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