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트메르 (2)
《세라비: 장하다 라를르의 딸》은 장편 소설입니다.
◆ 캐릭터 소개
◆ 처음 오신 분은 1화부터 읽어 주세요.
끝도 없이 이어지는, 카드놀이로 뜨겁게 불타오르는 병사들의 휴게실과 요리사가 밥도 안 짓고 음식찌꺼기 위에 퍼질러 자고 있는 주방 등을 지나자, 고위 장교들의 집무실인 듯한, 다른 방보다 깨끗하고 전시 중의 물자 부족에도 불구하고 꽤나 호사스러워 보이는 방이 세라비의 눈앞에 나타났다. 문 앞에는 아까 울타리 곁에 있던 병사들보다 훨씬 더 군기가 바짝 들어간 병사가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세라비는 다시 고양이를 이용하는 것을 포기하고 건물 밖으로 돌아가 창문 쪽으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예전에 어느 무역상의 보따리에서 강제로 빼앗은 물건임에 틀림없는 이국적인 태피스트리와, 그것과 하나도 어울리지 않지만 역시 비싸 보이는 커튼들이 묵직하게 드리워진 대장의 집무실 안에는 가지각색의 도자기나 장식품들이 조화를 전혀 고려치 않고 빽빽이 진열되어 있었다.
스칼하븐의 대장 각하는 생긴 것과는 다르게 화려하고 예쁜 거라면 뭐든 다 좋아해서 곁에 두고 싶어 했다.
그런 탓인지, 지금 그의 눈앞에 세련된 드레스로 몸을 감싸고 은은한 향수냄새를 풍기며 그가 자랑하는 오스틴 산 꽃무늬 가죽소파(적국의 제품이다)에 앉아 슬픔에 젖은 눈을 하고 전쟁으로 헤어진 어머니 얘기를 하고 있는 이 아무개 양이라는(이름이 뭐랬더라? 두부? 두바?) 금발의 아가씨 역시 대장의 컬렉션과 마찬가지로 화려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어머니 일로 참으로 마음고생이 많으시겠소.”하고 대장이 위로의 말을 건네자 아가씨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훌쩍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대장은 측은한 마음이 들어 손수건을 아가씨에게 건넸다. 창 밖에서 지켜보던 세라비는 레이가 그 손수건이 명품임을 알아보고 눈물을 닦는 척하며 소매자락에 넣는 것을 보고 아직은 제정신임을 확신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아까부터 거듭 상당히 죄송한 얘기지만, 우리 부대는 귀한 분을 전쟁으로 불바다가 된 칼베르에 그냥 보내드리기가 참으로 어려우므로…”
울고 있는 아가씨를 보며 마음이 약해진 대장이 완고한 어조를 누그러뜨리고 부드럽게 말했다. 뒤베 양은 더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사실 이카리아와 칼베르의 교류가 끊긴 이후로, 대장과 병사들은 할 일이 없어 지루하게 지내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이카레이유에서 정기적으로 시찰을 나오시는 본국의 사신 양반들께 매일같이 ‘통과승객 없음. 수상한 기미 없음. 기타 등등 모두 없음’이라고 쓰여 있는 일지를 내밀며 철통 같은 수비를 재확인시켜 드리며 의기양양했던 스칼하븐의 대장은, 이 깨끗한 일지에 갑자기 ‘통과객, 뒤베 양 외 3명’이라고 기재하여 높으신 양반들의 심기를 어지럽히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러나, 무역상들이나 얼빠진 관광객들이라면 무섭게 겁을 줘서 되돌려 보내면 그만인데, 어여쁜 아가씨의 눈물의 호소는 대장의 수비 범위 밖의 일이었다.
“어머니를 만나게 되면 반드시 대장님께 은혜를 갚을게요!” 뒤베 양은 애원했다. “서류상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 대장님께도 책임이 돌아갈 일은 없을 거예요! 저 정말 수상한 사람… 아니에요!”
아가씨는 더욱더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방문 밖에서 지키고 있는 경비병들이 아가씨의 울음소리를 듣고 자신을 파렴치한 놈으로 생각할까 두려워진 스칼하븐 대장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당황해하는 대장의 모습을 곁눈으로 알아챈 뒤베 양은 이카리아 전통 자수 문양의 지갑을 열어 정교하게 세공된 브로치 하나를 꺼내 대장에게 건넸다.
“이것을… 받아 주세요.”
무심코 브로치를 집어든 대장은 그것이 칼베르 제일의 명품 보석 브랜드 ‘부쉐렐’ 임을 알아보았다.
“대장님의 망토에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아가씨는 부끄러운 듯이 이렇게 말했다. 대장이 망설이자 아가씨는 소파에서 일어나 대장의 옷에 브로치를 직접 달아 주었다. 대장은 거울을 보고 좋아서 입이 벌어졌다.
“돌아오는 길에 더 사 올게요.” 아가씨는 약속했다. 대장은 그만 아가씨를 비롯한 네 사람의 통과증에 서명을 하고 말았다.
이 모든 광경을 창밖에서 지켜보던 세라비는 깊이 감탄했다. 대장이 손수 문을 열어 주었고, 뒤베 양은 대장에게 돌아오는 날 뵙자며 달콤한 미소를 날렸다. 대장의 따뜻한 배웅과 경비병들의 호위 가운데 뒤베 양은 당당히 집무실을 나섰다.
세라비도 마음을 놓고 마차로 돌아가려고 발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 한 무리의 병사들이 둘둘 말린 종이뭉치를 들고 대장의 집무실로 달려왔다.
“대장! 마을에 이런 것이 돌고 있습니다!”
“뭔가? 그렇게 다급하게…”하며 종이를 펼친 대장은 깜짝 놀라 큰 소리로 외쳤다. “지금 그 아가씨 일행 어디 있나?”
세라비는 가슴이 덜컥 주저앉아 벽 뒤로 몸을 붙이고 숨었다. 대장은 종이뭉치를 집어던지며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잡아들여라! 절대 국경을 넘게 해선 안돼! 전쟁이다!”
전쟁이라는 소리에 병사들은 각자 이해 불가능한 괴성을 지르며 여기저기로 달려 나갔다. 세라비는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었지만, 아무튼 아직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을 레이첵과 왕자를 구하기 위해 바닥에 떨어져 있는 제법 튼튼해 보이는 나무토막을 집어 들고 마차 대기소 쪽으로 달려갔다.
갑자기 누군가가 세라비를 끌어당겼다. 뒤베 양의 옷차림을 하고 있는 레이였다.
“세라비 님!”
“여기서 뭐 하고 있어?” 세라비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레이첵이랑 왕자님이 붙잡히게 생겼어!”
“지금 가면 우리도 잡혀요.” 레이가 마차 대기소 쪽을 가리켰다. 과연 모든 병사들이 마차를 향해 몰려가고 있었다. 말들이 히힝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니 레이첵이 마차를 몰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다 된 줄 알았는데 왜 갑자기 잡아들이라는 거지? 어떻게 된 거야 대체!” 세라비가 분통을 터뜨렸다. “어디서 발각된 거지?”
“세라비 님, 이걸 보세요.” 레이가 내민 것은 아까 스칼하븐의 대장이 집어던진 둘둘 말린 종이뭉치 중 한 장이었다. 세라비는 종이를 펴보고 경악했다.
“이건 왕자님이잖아? 왜 왕자님을 찾는 포스터가 여기에 있지?”
“글쎄요.” 레이가 대답했다. “보아하니 왕자님이 거짓말하고 도망간 게 발각이 된 모양이군요.”
플로르 왕자와 코토란이 짐가방을 꾸려 왕궁을 나선 다음날, 팔레 에클라에는 생뜨 크로페 대학의 우수 청소년 초청 강좌가 교수진의 단체 식중독으로 인해 다음 달로 연기되었음을 알리는 편지가 배달되었다. 왕자가 헛걸음을 치고 돌아올 줄 알았던 마르셀 왕과 플로렌틴 왕비는 홀로 돌아온 코토란을 보고 깜짝 놀랐다.
강좌가 연기되었음을 몰랐던 코토란은 왕자님이 잘 도착해서 열심히 공부하고 계신다고 말했고, 왕은 코토란을 감옥에 집어넣었다.
충성스러운 코토란은 고문에도 절대 입을 열지 않았고, 플로렌틴 왕비는 왕자를 찾는 포스터를 그려 즉시 전국에 뿌리도록 명령했다. 코토란이 이카레이유에 돌아온 지 이틀도 안 되어 온 국민들이 왕자의 실종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 까닭에, 1분만 빨랐어도 무사히 지나갈 수 있었던 포르트메르 교역소에서 세라비 일행은 발목을 잡히고 만 것이었다.
스칼하븐의 대장은 분노에 타오르며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이카리아의 왕자가 몰래 국경을 넘어가려고 하다니, 본국에서 알면 모두 처형이다! 흠집 내지 말고 잡아와라!”
“그런데요 대장…” 옆에서 부하 하나가 끼어들었다. “그냥 얼굴만 닮은 사람이면 어떡하죠? 괜히 아가씨만 더 울고불고 그러지 않겠습니까?”
아가씨가 운다는 말에 대장은 잠시 숙고하였다. 그러나 아가씨의 눈물도 아가씨가 사다 준다는 부쉐렐의 브로치도, 본국의 처벌을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에잇! 아니어도 할 수 없다! 반항이 심하면 약간의 흠집도 허가할 테니 일단 잡아라!”
병사들은 오랜만에 본연의 의무를 다할 생각에 신이 나서 함성을 질렀다.
세라비는 레이첵이 칼베르 쪽으로 도망칠 거라고 생각하고 레이와 함께 그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윽고, 몰려드는 병사들을 말발굽으로 짓밟으며 자기네들 쪽으로 다가오는 마차를 보고 세라비는 경악했다.
“저 녀석이… 도대체 어느 쪽으로 오는 거야! 칼베르는 저쪽이라구!” 세라비는 절규했다. 세르비카 경이 준비해 준 말들은 모두 발 빠른 명마들이었으므로, 마차는 레이첵이 이끄는 대로 전력질주하고 있었다.
“누나! 레이 형님! 어디 계세요!”하고 레이첵이 외치는 소리를 들으니 아무래도 레이첵은 이 위급한 상황에서 세라비와 레이를 구출하려는 생각임에 틀림없었다. 세라비는 스스로 머리를 쳤다.
“우리 걱정은 말고 그냥 가 이 멍청아… 네가 이쪽으로 오면 어떡하라구!”
그러는 동안, 문자 그대로 쏜살같이 날고 있던 레이첵의 마차는 그늘에 숨어서 머리를 치고 있는 세라비와 레이마저도 지나쳐버렸다. 레이는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세라비를 잡아끌고 한 손으로는 드레스 자락이 걸리적거리지 않도록 걷어올린 다음 마차가 간 방향으로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달려가던 중 말을 탄 장교 하나를 발견한 레이는 그를 끌어내려 때려눕히고 드레스 차림이 눈에 띄지 않도록 그의 겉옷을 걸쳤다. 말에 올라서도 헤롱거리고 있는 세라비에게 레이가 외쳤다.
“꽉 잡아요! 떨어져도 못 구해줘요!“
세라비는 가까스로 정신을 붙들고 레이에게 매달렸다. 레이는 말을 타고 전속력으로 마차를 따라잡기 시작했다.
마차는 이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이카리아 쪽에 와 있었다. 아줌마가 노점에서 볶는 알감자 냄새가 날 정도로 가까워져 있었다. 레이의 등 뒤에 매달려 가던 세라비는 멀어져 가는 칼베르 땅을 바라보며 통한의 울음을 터뜨렸다.
레이첵이 모는 마차는 이제 거대한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질주하고 있었다. 쇠 축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귀를 찢었다. 매캐한 흙먼지 속에서 다가오는 나무 외벽을 본 말들은 본능적으로 속도를 줄이며 앞다리를 높이 쳐들고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내질렀다. 마차 바퀴가 위태롭게 미끄러지며 흙바닥이 패였다. 바퀴 한쪽이 들려 올라가며 마차가 기울어졌다. 마차가 전복되면 안에 있는 플로르 왕자는 죽을 수도 있었다. 레이첵은 마부석에서 굴러 떨어지지 않도록 가까스로 몸을 가누며 고삐를 꽉 쥐었다.
위태롭게 기울어지는 마차를 거의 따라잡은 레이가 한쪽 손을 뻗으며 주문을 외쳤다. 그의 손끝에서 보이지 않는 힘이 폭발하듯 뻗어나가자 나무로 된 튼튼한 외벽이 쩌저적 쾅! 하고 안에서부터 터져나갔다. 부서진 나뭇조각들이 아슬아슬하게 잔해를 뚫고 지나가는 마차 바퀴에 부딪쳐 튕겨 날아갔다.
마차가 포르트메르 성 밖의 도로에 진입하는 순간, 레이는 단숨에 마차를 따라잡았다. 그는 등 뒤에 매달려 있던 세라비를 붙잡아 그대로 마부석으로 던졌다. 세라비의 몸이 레이첵에게 부딪치며 고삐가 손에서 빠져나갔다. 마차가 순간 휘청거렸다. 레이는 망설임 없이 뛰어들어 떨어진 고삐를 낚아챘다. 뒤에서 스칼하븐 병사들이 자기네 섬 지역에서 쓰는 전통어로 “타덤! 타덤 레반데!(잡아! 생포해!)”하고 날카롭게 외치는 소리가 메아리쳤다. 레이가 고삐를 잡자 마차는 다시 속도를 높이며 질주하기 시작했다.
“아아, 칼베르에 거의 다 왔었는데!” 세라비가 눈물을 공중에 흩뿌리며 울부짖었다. 바람같이 달리는 마차 위에서 레이도 숨가쁘게 외쳤다. “뒤돌아보지 마세요! 다시 잡히면 고문을 받고 혀를 뽑힐 거예요!”
마차 안은 순식간에 울음과 비명으로 가득 찼다. 말 탄 무장한 스칼하븐 병사들은 아직도 세라비들의 마차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돌진해오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쫓아오지 않는다 해도 어차피 다시 저 길을 돌아가 교역소를 지나 칼베르로 간다는 것은 이미 절대 불가능했다.
이윽고 레이와 교대한 세라비는 고삐를 받아 들고, 행여나 끈질긴 스칼하븐 군이 혀 뽑는 기구를 가지고 끝까지 뒤를 쫓아올까 하는 두려움에 생전 처음으로 그렇게 격렬하게 마차를 몰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