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트메르 (3)
《세라비: 장하다 라를르의 딸》은 장편 소설입니다.
◆ 캐릭터 소개
◆ 처음 오신 분은 1화부터 읽어 주세요.
마침내 겨우 스칼하븐의 병사들을 완전히 따돌린 세라비는 저녁 무렵쯤 포르트메르에서 멀리 벗어나 포르텔 몽테의 구릉이 보이는 시골길로 접어들었다. 세라비는 마차를 멈추고 말들에게 시냇물을 마시게 해 주었다. 플로르 왕자가 노랗게 뜬 얼굴로 마차에서 내렸다. 마차 안에서 몇 번 구르긴 하였으나 세라비가 둘러 준 망토 덕분에 다행히 타박상만 입은 정도였다.
그리고 역시 매우 아파 보이는 레이첵, 여전히 여장 차림 그대로인 레이도 마차에서 내려왔다.
“이제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지만,” 세라비는 말했다. “우선 쉬고 보자!”
일행의 타는 속을 알 길 없는 선선한 저녁바람이 종달새가 날아오르는 시골 들녘을 스쳐 지나갔다. 멀리 지평선 위로 부드럽게 곡선을 그리며 펼쳐져 있는 포르텔 몽테의 언덕들 위로 빨간 저녁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자 이제 어떡하죠 누나?” 레이첵이 세라비에게 물었다. “포르트메르 통과는 실패로 끝났는데, 어디로 가야 좋을까요?”
“실패로 끝난 이유가 다 네 탓인줄은 알고 하는 소리냐!” 세라비가 사촌의 멱살을 잡으며 소리쳤다. “누가 나 구하러 오랬냐! 왕자님을 데리고 칼베르에 먼저 들어가서 기다리랬잖아! 너 때문에 칼베르에 다 갔다가 도로 돌아왔잖아!”
“누나랑 레이 형님이 붙잡힌 줄 알고 그랬죠! 갑자기 병사들이 몰려오니까 다 발각된 줄 알고 그런 거잖아요!”
“이 호박 같은 놈아! 시키는 대로만 할 것이지 왜 네 맘대로 상상해? 나랑 얘가(세라비는 레이를 가리켰다) 잡혀 죽는 한이 있어도 너랑 왕자님은 넘어가서 게로스를 만나야 되는 거였어!”
“어떻게 누나랑 레이 형님을 두고 그냥 넘어가요?” 레이첵이 울먹이며 말했다. “누나랑 레이 형님 없이 저랑 왕자님만 간다고 해도 사신 임무가 해결되는 건 아니잖아요.”
그건 사실이었으므로 세라비는 사촌을 한 대 치려던 손을 거두었다. 시냇물에서 세수를 하던 레이가 고개를 들었다.
“모두 무사하다는 게 중요한 거니까 이미 끝난 일 갖고 싸우지들 마세요. 칼베르로 가는 길이 그거 하나뿐이겠어요?”
“그건…” 세라비는 생각에 잠겼다. 포르트메르 교역소를 빠져나오는 순간 임무에 실패했다는 생각과 함께 세라비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분명히 ‘실패했으니까 삼촌한테 조금 혼나고 나서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과연 삼촌이 호락호락 보내 줄 것인가가 문제였다. 세라비가 이카레이유를 떠날 때, 세르비카 경은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적당히 하는 척 하다가 실패했다고 하면서 돌아올 생각 꿈에도 하지 말거라! 이 임무는 네가 돌아오는게 곧 실패야!”
“이제 어쩜 좋아요 누나?” 레이첵이 애처롭게 물었다.
“모르겠다.” 세라비는 우울하게 대답했다. “다시 삼촌한테 돌아가서 다른 루트를 알아봐 달라고 할 생각인데 네 생각은 어떠니?”
“그러면 저 몰래 따라온 것도 아버지가 다 알게 되잖아요. 왕자님도요.”
레이는 아름다운 드레스 자락이 땅바닥을 휩쓰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저만치에서 플로르 왕자와 땅바닥에 그림을 그리며 놀고 있었다. 그런 광경을 레이첵이 슬픈 눈길로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고 세라비는 사촌동생의 어깨를 두드리며 어른스럽게 말했다.
“괜찮아 레이, 비록 며칠만에 다시 돌아오긴 했지만 죽음을 각오한 밀사의 길에 동행한 너의 용기는 칭송을 받을 거야. 그 마음가짐 그대로 왕궁 서기 일 역시 꿋꿋하게 계속한다면…”
“누나,” 레이첵이 가로막았다. “사실, 아버지가 이럴 경우를 대비해서 편지를 주신 게 있어요.”
“뭐라고?” 세라비가 놀라 되물었다. “삼촌이?”
레이첵은 우울하게 대꾸했다. “네. 아버지가 떠나기 전에 누나한테 이 편지를 전해주라고 하셨어요. 어차피 저도 동행할 거라, 제가 갖고 있었어요.”
레이첵이 꺼낸 편지 겉봉에는 ‘포르트메르 실패시 열어볼 것’ 이라고 삼촌의 글씨로 쓰여 있었다.
“그럼 그렇지…” 이 참에 다시 이카레이유로 돌아가 다른 밀사를 알아보라고 말할 참이었던 세라비는 실망스럽게 중얼거렸다. “삼촌은 용의주도하시니까… 그럼 그 편지 좀 보자꾸나. 틀림없이 좋은 생각이…”
세라비는 레이첵에게 편지를 받아들어 펼쳐 보았다.
『세라비야, 지금 이 편지를 읽고 있다면 넌 아마도 포르트메르 통과에 실패하고 어떻게든 도망쳐 숨을 돌리는 중이겠지.』
“쪽집게시군요 삼촌.” 열심히 해 보았으나 결국 세르비카 경의 손바닥 안이었음을 자각한 세라비는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행여라도 포르트메르에서 실패했다고 해서 이카레이유로 돌아올 생각은 하지 말거라. 네가 칼베르에 가지 않으면 우리 나라는 망한다.』
세라비의 갑작스런 비명 소리에 레이와 플로르 왕자가 달려왔다.
“무슨 일이세요 세라비 님?”
“말도 안 돼…” 세라비는 부들부들 떨었다. 레이가 세라비의 손에서 편지를 받아 재빨리 읽었다.
“’…브뤼메 산맥을 넘어서라도 일단 칼베르 땅에 발을 들이는 것만 생각해라.’”
“브뤼메 산맥이요?” 레이첵이 놀라 물었다.
“브뤼메 산맥을 넘을 수가 있어요?” 플로르 왕자도 물었다.
“브뤼메 산맥을 대체 어떻게 넘으란 말이지? 이건 칼베르에 못 가면 차라리 죽으라는 얘기잖아!” 세라비는 마침내 피를 토하는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칼베르와 이카리아를 넘나들기 위해서는 두 나라의 교역의 장소로 발달해 온 이카리아의 포르트메르와 칼베르의 마르벤을 통과해서 가는 것이 현재로서 알려진 유일한 방법이었다.
브뤼메 산맥은 포르트메르와 마르벤을 양쪽에 끼고 이카리아와 칼베르 사이를 가르며 뻗어있는 험준한 산맥이었다. 역사가 시작된 이래 이 산맥을 넘어 양국을 넘나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좀 돌아가는 한이 있어도 포르트메르나 마르벤을 거치는 것이 빠르고 안전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산맥은 그 험준함 때문에 오랫동안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아, 현대에 들어 사라진 요정, 고대의 종족들, 심지어 괴물들마저 남아있다고 믿어지는 까닭에 사람들은 더욱더 산맥을 가까이하려 들지 않았다.
그런데 세르비카 경은 그런 브뤼메 산맥을 넘어서라도 칼베르로 가라는 것이었다. 세라비는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삼촌이 장손의 임무를 다하라고 하셨을 때에는 설마 죽으러 가라는 것인 줄은 상상도 못했어!”
조용한 시골길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레이첵은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어디선가 까치가 푸드득거리며 날아올랐다.
그러나 그때, 레이가 세라비에게 다가와 어깨에 살며시 손을 얹고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세라비 님,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 칼베르 갈 수 있어요.”
“어…떻게?” 세라비는 붉어진 눈을 감추며 물었다. “진짜루 산맥을 넘어가? 아니면 무슨 다른 방법이라도?”
“역시 레이 형님!” 레이첵이 희망에 차서 외쳤다. “마르벤으로 가시려는 거죠? 저도 방금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아니에요 세르비카 군,” 레이가 웃으며 말했다. “마르벤은 포르트메르와 정반대 방향이라 거기까지 가는 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요. 게다가, 우리가 포르트메르에서 이미 한번 실패를 했기 때문에, 우리가 도착할 때쯤이면 마르벤의 오스틴 군에서도 정보를 입수했을 거예요.”
“하지만 브뤼메 산맥보다는 덜 위험할 거 아냐!” 세라비가 말했다.
레이는 고개를 저었다. “포르트메르에서 스칼하븐 군을 직접 보시고도 그러세요 세라비 님? 마르벤을 지키고 있는 오스틴 군인들은 스칼하븐보다 더 무식하고 사납다고 해요. 브뤼메 산맥이 길은 험하지만 아마도 가장 안전한 곳일 거예요.”
“하지만 브뤼메 산맥 안에는 괴물들이 산댔어요!” 플로르 왕자가 말했다. “병사들보다 괴물이 더 무서운 거 아닌가요?”
“브뤼메 산맥은 마침 제가 라마야나 스승님과 함께 수련을 하던 곳이랍니다. 길을 잘 찾아서 넘어가면 칼베르로 들어갈 수 있어요. 게다가 이쪽은 오스틴 군도 스칼하븐 군도 절대 쫓아오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전혀 걱정하실 거 없어요.”
세라비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렇구나… 그럴 수도 있구나!”
레이는 씨익 웃었다. “걱정할 거 하나도 없어요. 우리가 가는 길이 곧 칼베르로 가는 길이라니까요!”
레이의 자신만만한 모습에 모두들 안심했다, 레이첵은 웃으며 물가에 매어둔 말들을 데리러 가고, 세라비도 마차를 정돈하기 시작했다. 레이첵이 마차에 말을 매는 동안 레이는 귀부인 가발을 벗고 드레스도 갈아입었다(그때까지도 계속 입고 있었던 것이다). 어둠이 깔려가는 시골 들판 저편으로 마을의 불빛이 하나둘씩 켜지며 깜박거렸다.
이번에는 레이첵과 레이가 마부석에 앉아 마을을 향해 마차를 몰았다. 부드러운 포르텔 몽테의 구릉 뒤로, 브뤼메 산맥의 눈 덮인 산봉우리들이 발치에 거무튀튀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