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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그녀의 미모에 모두 넋을 잃었다

포르트메르 (1)

by 마봉 드 포레

《세라비: 장하다 라를르의 딸》은 장편 소설입니다.

캐릭터 소개

처음 오신 분은 1화부터 읽어 주세요.


한때 칼베르와 이카리아 사이를 오가는 관광객들과 무역상들로 붐비던 화려한 교역의 도시 포르트메르는 망해가는 유령 도시로 변해 있었다.


먼 옛날 포르트메르 백작 개인 소유의 성이었으나, 국가에서 사들여 교역소로 개조하여 번영을 누리던 포르트메르 교역소는, 반년 전부터 스칼하븐의 군대가 주둔하면서 살벌하고 우중충한 군사 지휘 본부가 되어 있었다.


포르트메르 교역소는 원래 한 번에 여러 대의 마차가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널따란 전용 도로가 방사상으로 나 있고, 그 사이사이에 정원수와 잔디를 심어놓아 외관상으로도 매우 아름다운 곳이었다. 지금은 스칼하븐 병사들이 무단으로 나무를 마구 잘라 성의 둘레에 담을 두르고, 정원과 널따란 전용 도로는 한 개만 남기고 모두 폐쇄한 후 병사들이 지낼 막사를 만들어 놓은 상태였다.


그리고 가장 험악하게 생긴 병사들을 입구 앞에 세워 누구도 지나갈 마음이 들지 않도록 했다. 밤중에도 도둑고양이 한 마리 얼씬하지 않는 철통 수비를 스칼하븐 군은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스칼하븐 군 주둔 이후 이용객이 거의 없었던 이곳은 삼 개월 전 마지막 이카리아 세관 직원이 철수한 것을 끝으로 스칼하븐 군대가 완전히 점령하게 되었다. 무장한 병사들을 겁낸 주민들은 포르트메르 교역소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고, 이용객도 어차피 거의 없었으므로 사실상 스칼하븐의 병사들은 무섭게 보이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었다. 스칼하븐 병사들은 나날이 계속되는 카드놀이로 실력이 거의 신선의 경지에 오르게 된 것 말고는 매우 한가하고 지루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교역소 앞길로 접어들자 뭐라 말할 수 없는 냄새가 바람을 타고 마차 안까지 흘러 들어왔다. 향신료 냄새가 섞인 기름지고 비린 냄새였다. 플로르 왕자는 코를 막으며 흡! 하고 숨을 참았다.


“아우 스칼하븐 놈들, 여기까지 와서도 생선 절여 먹나 보네요. 청어가 없으니 정어리를 절였나.” 레이가 손에 쥐고 있던 검은 새털부채를 자신의 얼굴을 향해 부치며 말했다.


교역소 앞길에서 적국의 병사들을 상대로 간식을 파는 노점을 운영하던 아줌마는 난데없이 이카레이유 번호판이 붙은 마차가 나타나자 깜짝 놀라 큰 소리로 물었다.


“인자 전쟁 끝났슈?”


마부석에 앉아 마차를 몰던 세라비는 덜덜 떠느라 대답도 제대로 못하고 그대로 교역소로 직행했다.


마차를 본 입구의 무장한 병사들과, 그 뒤편 안뜰 어딘가에서 새로운 카드기술을 연마 중이던 나머지 병사들도 깜짝 놀라 마차를 멍하니 응시했다. 칼베르에서 물건을 사 오거나 팔지 않으면 간판 내리고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장사꾼들마저 포기하고 찾아오지 않는 이곳에, 국경을 통과하겠다고 찾아오는 사람이 있단 말인가? 우리가 카드기술을 연마하는 동안에 벌써 전쟁이 끝난 것인가? 끝났으면 누구의 승리로 끝난 것일까? 스칼하븐 병사들의 머릿속에는 짧은 순간 여러 가지 생각들이 스쳤다.


세라비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크게 외쳤다(당당하게 보이도록 그렇게 하라고 레이가 시켰다).


“칼베르로 가는 뒤베 양이시오! 출국 허가증을 가지고 있소.”


입구의 감시병들 중 가장 험악하게 생긴 고참 병사가 마차로 와서 말했다. “누구길래 칼베르에 가겠다는 것인가? 전쟁 중이라 함부로 지나갈 수 없다는 것을 모르나?”


세라비는 감시병의 큰 덩치와 몸에 매달고 있는 무기들의 흉악한 형태를 보고 더욱더 덜덜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칼베르에 계신 어머님의 임종을 지키러 가시는 길이오! 한시가 시급하니 어서 길을 내주시오.”


“전쟁 끝난 건가요?”하고 가장 어린 나이로 고향을 떠난 스칼하븐 병사가 옆에서 속삭였다. 고참 감시병은 전쟁도 안 끝났고 자기들의 모습도 이렇게 무서운데 감히 국경을 넘겠다고 찾아온 겁 없는 이카리아 인들의 태도가 너무 괘씸한 나머지 화가 치밀었다.


“일단 심사실로 안내해라.”하고 그는 부하에게 명령했다. 귀찮은 듯이 말했지만 감시병의 마음은 지겨운 카드놀이 말고 다른 할 일이 생겼다는 생각에 약간 설레기 시작했다.


다른 병사들도 역시 그랬기 때문에 모두들 카드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뒤베 양의 마차를 따라갔다.


세라비는 덜덜 떨리는 몸을 억지로 꼿꼿이 세우며, 한때는 관광객들과 사신들과 무역상들로 북적거렸으나 지금은 지저분하고 황폐한 막사로 변모한 기념품 가게, 식당 그리고 영빈관 등을 지나, 칼베르와 이카리아 국기 위에 스칼하븐의 청상아리 문장이 그려진 푸른 국기가 내리 덮듯이 걸려 있는 안쪽 저택을 향해 마차를 몰았다.


미리 전갈을 받은 스칼하븐의 대장이 위압적인 모습으로 세라비의 눈앞에 나타났다. 세라비는 세르비카 경이 만들어준 하녀 셀린과 뒤베 양의 가짜 신분증과 레이가 어젯밤에 가짜를 또다시 위조해서 만든 레이첵과 플로르 왕자의 신분증, 그리고 통행허가 요청서를 가지고 마부석에서 내려왔다. 대장은 신분증과 서류들을 받아 들고 심각하게 읽는 척했다.


“왜 전시 중에 칼베르에 가려는 것인가? 아무래도 수상하군!”


“아가씨는 칼베르에 계신 어머님의 임종을 지키러 급한 길을 가시는 중이니 가족의 도리를 다 할 수 있도록 협조하여 주시기를 요청드립니다. 존경하는 스칼하븐의 대장 각하!”


세라비는 준비해 온 대로 이렇게 말하고 뇌물이 든 꾸러미를 대장에게 내밀었다. 대장은 꾸러미를 살짝 열어보고 좋아서 입이 절로 벌어지는 것을 억제하며 위엄 있게 보이려고 헛기침을 했다.


“효녀 났군.”하고 가족과 이미 몇 년째 생이별 중인 스칼하븐의 대장은 말했다. “여행목적은 이카리아와의 협약에 따라 정당하나, 칼베르는 지금 전쟁으로 매우 위험하므로 국경을 통과하려면 더 조사를 해야 하니 일단 모두 내려서 심사실로 가 주시오.”


세라비는 여전히 덜덜 떨면서 마차로 가 문을 열었다. 아가씨의 하인인 레니에 군이 먼저 내려 도련님과 아가씨를 부축하기 위해 손을 내밀었고, 아가씨의 어린 동생인 프랑수아 도련님의 뒤를 따라 레니냐 뒤베 양이 검은 새털부채로 얼굴을 살짝 가리고 한 손으로 드레스 자락을 살포시 들어 올리며 마차에서 내렸다.


귀부인답게 틀어 올린 머리에 검은 리본과 진주 장식을 한 큰 키의 늘씬한 뒤베 양은 세르비카 저택의 하녀장과 침방 하녀들이 밤을 새워 레이의 치수에 맞게 지은, 온갖 기교를 다하여 고급스럽고 우아하게 만든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목까지 올라오는, 자르르한 윤기가 흐르는 검은 드레스는 같은 검은색 레이스와 가슴의 프릴 장식으로 최소한만 꾸몄음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화려했다. 오히려, 머리에서 발끝까지 검정칠을 하여 아가씨의 정숙함을 표현하고자 한 것이 아가씨의 슬픔에 잠긴 애처로운 얼굴을 돋보이게 했다.


오랫동안 여자라고는 교역소 앞길의 노점 아줌마밖에 보지 못했던 스칼하븐의 병사들은 뒤베 양의 신랄하게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넋을 잃었다. 뒤베 양은 시선이 집중되자 눈을 내리깔며 더욱 슬프고 예쁜 척을 했다. 두려움으로 정신을 잃을 지경인 세라비의 바쁜 눈에도 레이가 이들의 경탄 어린 시선을 즐기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윽고 심사실로 들어간 세라비들에게 스칼하븐의 대장은 별안간 이렇게 선포했다.


“신분증도 서류도 모두 문제가 없으나(실제로는 자세히 보지도 않았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일행의 대표로서 뒤베 양을 좀 더 조사할 필요가 있겠소.”


“말도 안 됩니다!” 하녀 셀린이 외쳤다. “왜 레ㅇ… 아니 아가씨가 의심을 받는 겁니까?”


“칼베르 가기 싫은가?” 대장은 거만하게 말했다. “아가씨의 안전을 위해 좀 더 자세히 체크를 해 드리려는 것뿐이니 나머지 분들은 안심하고 먼저 나가서 기다리도록 하게.”


저런 여자에 환장한 놈들 같으니라구, 하고 세라비는 속으로 이를 갈며 생각했다. ‘오죽하면 여장한 남자만 보고도 저렇게 발작을 일으킬까!’


셀린의 격렬한 항의에도 불구하고 무기를 든 스칼하븐 병사들은 겁에 질려 떠는 척하는 뒤베 양을 둘러싸고 어디론가 데려갔다. 세라비는 걱정과 (레이의 신변이 아니라 레이가 자신의 미모에 취해서 무슨 엉뚱한 일이라도 저지르지 않을지에 대한) 불안으로 자꾸자꾸 뒤를 돌아보며 마차를 몰았다.




“이리 와서 짐 검사 받으시오.”하고 스칼하븐 병사가 안내하는 곳으로 가 보니 아까보다 두 배는 더 지루해 보이는 표정의 스칼하븐 병사들이 카드를 섞다 말고 일어나 세라비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수상한 물건들이 나오면 당장 교역소에서 강제 퇴거인 것은 알고 있겠지? 그럼 짐을 열어 보시오.”하고 그중 지위가 높아 보이는 장교가 명령했다.


세라비는 치사함에 몸을 떨며 스칼하븐 병사들이 수상하다는 명목으로 그들의 짐에서 마음에 드는 것을 하나 둘 챙겨 가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무기도 없고 밀수품도 없는데 뭘 자꾸 가져가요?” 세라비가 항의했다.


“이럴 때에 국경을 넘는 것 자체가 수상하기 때문에 정밀 조사를 하는 것뿐이오. 우리 권한이니 맘에 안 들면 도로 이카리아로 돌아가쇼!” 병사들이 말했다.


세라비는 주먹을 불끈 쥐고 마차의 짐칸은 물론이고 손가방까지 싹 뒤지는 병사들을 죽일 듯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다행히도, 발견되면 절대 안 되는 물건들은 작은 꾸러미에 싸서 세라비의 망토 안에 미리 꿰매 두었다. 그 속에는 잃어버리면 자결이라도 해서 죄를 갚아야 할 국보 뤼넬과, 스칼하븐 병사들이 발견하면 반드시 반출한도 초과라고 우기며 압수해 갈 여행자금이 들어 있었다.


검사가 끝나자 세라비들은 마차 대기소에 마차를 대고 아가씨를 기다려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세라비는 재빨리 마부석에 올라, 마차 대기소로 연결되는 나무 울타리문을 향해 쏜살같이 마차를 몰았다. 안에 타고 있던 레이첵과 플로르 왕자가 쿵 하고 넘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세르비카 양, 세르비카 양! 레이 님이 아직 안 왔어요!”하고 왕자가 마차 안에서 외쳤다. 세라비는 마차를 급히 세웠다.


“왕자님, 셀린이라고 부르랬잖아요! 들키면 우리 다 죽어요!”하고 마차 안에서 레이첵이 말했다(자기가 플로르 왕자를 왕자님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했다). 왕자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더니 금세 눈물을 글썽거렸다. 레이첵은 허둥지둥 왕자를 달래기 시작했다.


마차 밖에서는 하녀 셀린이 스칼하븐 병사한테 욕을 먹고 있었다.


“앞을 보고 운전을 해야지 이 사람아! 문 부서지면 이거 다 물어내야 돼!”


“죄송합니다.” 세라비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억제하며 대답했다. “그런데 우리 아가씨는 아직 심사가 안 끝났나요?”


“모르지. 금방은 안 끝날걸? 대장님이 귀부인이라고 과자라도 대접하고 계신가?” 병사의 말에는 대장이 부럽다는 뉘앙스가 담겨 있었다. 세라비는 걱정으로 온몸이 뒤틀렸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레이라면 걱정 없겠지만, 과연 그 놈들이 레이를 빨리 보내줄까? 별일 없겠지? 무작정 기다리고 있을 수도 없고… 놈들이 설마 레이한테 나쁜 짓이라도 하려 들다가 여장을 들키기라도 하면!’


마침내 결심한 세라비는 레이첵에게 조용히 말했다. “레이야, 너 혼자라도 왕자님을 모시고 칼베르 쪽 입구로 나가. 나는 레이하고 곧 뒤따라 갈게. 뒤돌아보지 말고 마차를 아주 빨리 몰아서 나가야 해, 알겠지?”


“누나!” 레이첵은 세라비를 다급하게 붙잡았다. “누나를 두고 갈 수는 없어요!”


“그래도 가야 해!” 세라비는 자신이 매우 단호하고 엄숙하다고 생각하며 말했다. “여기서 칼베르로 나가는 도로는 하나뿐이니까, 내가 오지 않아도 기다리지 말고 여길 나가도록 해. 내가 안에서 소란을 피워서 주의를 끌 거니까 시끄럽다 싶으면 바로 출발해. 첫 번째 마을에서 묵고 있으면 내가 레이와 같이 뒤따라 갈게.”


“안 돼요 누나! 누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한다면…” 레이첵은 이렇게 말하다가 옆에서 듣고 소리 없이 울고 있는 왕자를 발견하고 입을 다물었다.


“…생길 리가 없죠.”


“부탁한다!” 세라비는 귀중품이 든 망토를 왕자의 몸에 둘러 주고, 레이첵에게는 채찍을 들려 마부석에 앉혔다.


세라비는 주위를 살펴보았다. 마차 대기소로 사용되는 이 빈터 역시 스칼하븐 병사들에 의해 거친 나무로 만든 울타리가 둘러쳐져 있었다. 나무 틈 사이로 감시병들을 보니 반은 졸고 반은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안쪽 경비는 허술하네.’하고 생각하던 세라비는 마침 운 나쁘게 근처를 지나가던 어린 고양이 한 마리를 번쩍 들어 벽 너머로 던졌다. 고양이는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땅바닥에 착지했다. 병사들은 무슨 일인가 하고 달려왔다가 귀여운 고양이를 보고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세라비는 잽싸게 울타리 위로 몸을 날려(세르비카 저택에 살 때 담을 하도 많이 넘어봐서 나무 울타리 정도는 가뿐했다), 스칼하븐 장교들이 숙소 겸 여러 용도로 쓰고 있는 별관으로 달려갔다.


검은 드레스를 입은 금발의 아가씨가 슬픈 표정으로 서 있다. 프릴과 망토가 달린 고급스러운 옷차림이며 창문과 촛불이 있는 실내 배경이다.
포르트메르 교역소의 성문 앞. 말 네 마리가 끄는 귀부인용 마차와 무장한 병사들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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