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르 왕자 (2)
《세라비: 장하다 라를르의 딸》은 장편 소설입니다.
◆ 캐릭터 소개
◆ 처음 오신 분은 1화부터 읽어 주세요.
숙연한 자세로 왕자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있던 세라비는 왕자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여 어리둥절했다. 왕자가 게로스 왕을 만나러 칼베르에 간다고? 우리도 마찬가진데? 하고 실망스러워하는 세라비의 귀에 레이의 침착한 목소리가 꽂혔다.
“전하께서는 정말로 용기 있는 분이십니다.”하고 아첨꾼 레이는 말했다. “전하야말로 가장 숭고한 마음으로 칼베르에 가시는 분이십니다.”
“난… 외국 공주들하고 똑같은 취급을 받고 싶지 않아요!” 플로르 왕자가 말했다. “난 전쟁하면서까지 게로스 님을 얻겠다는 욕심 같은 건 추호도 없으니까요! 난 그저… 그분이 그런 무서운 사람들의 손아귀에 떨어지는 걸 막고… 그저, 그…그분 겨…곁에…”
세라비는 둘 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했지만 이번만은 정말 누구한테 물어보지 않고서는 무슨 얘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세라비가 결국 레이에게 무슨 얘긴지 좀 알려달라는 눈빛을 계속해서 보내자, 숭고가 어쩌고 용기가 어쩌고 하면서 왕자의 비위를 열심히 맞추고 있던 레이는 아첨을 잠깐 멈추고 세라비에게 다가왔다.
“세라비 님,”하고 레이는 약간 짜증을 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렇게도 눈치가 없으세요? 세라비 님이 이 나라 왕자였으면 아무리 나라가 위급해도 목숨 걸고 옆나라에 직접 가서 나라를 구하겠어요? 수당만 좀 얹어주면 우리같이 대신 가줄 사람들도 있는데?”
“아니… 그러니까 나라를 사랑하는 왕자라면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냐?” 바보취급 당한 것이 기분 나빠진 세라비가 말했다. “내 나라는 내 힘으로 지킨다는…”
“세라비 님도 참. 높은 사람일수록 안전한 자리에 앉아서 명령을 내리지 뭐 하러 직접 위험을 감수하겠어요? 아랫것들 보내면 되는걸.”
위험을 감수하는 아랫것으로서의 자신을 자각한 세라비는 더 늦기 전에 다 집어치우고 도망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세라비의 속을 훤히 꿰뚫고 있는 레이는 “이미 늦었어요! 세르비카 경께서 라를르 마을에 가서 세라비 님을 도로 끌고 와 칼베르 국경지대로 던져버릴 거라구요!”라고 말했다.
세라비는 이 말에 분통을 참지 못하고 눈물을 글썽였다.
“이렇게 될 줄 알았어! 칼베르에 가는 척하고 다른 데로 도망가야겠어. 삼촌이 절대 찾지 못할 곳으로…”
“무슨 소리세요?” 레이가 말했다. “왕명으로 가는 건데 중간에 도망쳐 버리면 이 나라에서는 이제 다 산 건데, 그럼 갈 곳이라고는 어차피 우리나라랑 붙어있는 칼베르 뿐이잖아요! 이러나 저러나 우린 칼베르에 갈 수밖에 없다구요! 그나저나 세라비 님은 왕자님이 무슨 얘기 하는지 정말 모르세요?”
플로르 왕자는 다 쏟아내 버리고 나서는 기운이 다 빠진 듯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었다. 곁에서는 코토란이 허둥지둥 왕자님의 기운을 북돋아주기 위해 뭔가 마실 것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쪽을 흘끗 쳐다본 레이는 세라비를 향해 목소리를 낮추었다.
“왕자님은 북쪽 나라 공주들처럼(그녀들과 똑같이 취급하지 말아 달라고 왕자가 부탁한 것을 레이는 그새 잊고 있었다) 게로스 왕한테 반해 있는 거라구요! 지위도 나라도 다 필요 없으니까 그저 그분 곁에 있고 싶다고 우리랑 같이 가시겠다는 거 아녀요!”
“뭐…뭐라고? 그, 그럼 왕자님이… 설마…”
“게로스 왕을 사모하는 사람들 중 하나일 뿐이죠.”하고 레이는 잘라 말했다. “편견에 가득한 세라비 님 눈에는 뭘로 보일지 모르겠지만요.”
세라비는 편견에 가득한 사람으로 보이기 싫어서 열심히 반박했다. “아니 나도 물론… 이해하고 있지! 오히려 자리 따위에 연연하지 않고 결단을 내린 왕자님의 자세야말로 진실한 마음 그 자체라고 볼 수 있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세라비는 코토란과 어떤 옷을 싸갖고 갈지 의논 중인 플로르 왕자에게 저벅저벅 다가가 철퍽 무릎을 꿇었다.
“전하!” 세라비가 외쳤다. “걱정 마십시오! 제가 이 한 몸 다 바쳐, 왕자님을 무사히 칼베르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잠시 말이 없던 플로르 왕자의 눈에 문득 눈물이 고였다.
“세르비카 양, 정말 뭐라고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세르비카 양의 충성을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그리고는 왕자는 어디서 났는지 금방 커다란 왕자의 검을 가져와 세라비의 한쪽 어깨에 가져다 댔다. “우리가 이번 원정의 목적을 다 이루고, 전쟁이 끝나 평화가 돌아오고, 그리고…” 플로르 왕자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분이 북쪽 나라들의 손아귀에서 자유로워지는 그날이 온다면, 내 비록 이 나라의 왕위 계승자로서의 지위를 포기한 거나 마찬가지이나, 나의 모든 권리를 동원하여 세르비카 양께 작위를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곁에서 누나가 작위를 미리 받는 장면을 보며 레이첵이 감동으로 오열하는 가운데, 레이는 창 밖으로 먼 산을 바라보며 조용히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왕자님마저 게로스 타령이라니… 쯔쯧.’
왕과 왕자의 알현은 끝났다. 세라비를 왕자비로 만들어 왕의 친척이 된다는 허황된 꿈에 빠져 있던 세르비카 경도 이윽고 정신을 차리고 세라비들을 집으로 데리고 갔다.
출발은 왕의 알현 이틀 후로 결정되었다. 세르비카 경은 미리 치밀한 계획을 세워 세라비가 도착하기 전에 이미 준비를 다 해 둔 상태였다. 이카리아와 칼베르 사이의 교류는 이미 끊긴 지 오래였으므로, 두 나라의 국경에 자리한 두 교역의 도시인 포르트메르와 마르벤을 통해 칼베르로 넘어가는 일은 매우 어려웠다. 그러나 피도 눈물도 없는 오스틴과 스칼하븐의 군대도 예외적으로 통행을 허가해 주는 일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가족 사망으로 인한 고국 방문이었다.
이것은 최소한의 인도주의적 의무를 이행하도록 세르비카 경이 오스틴과 스칼하븐 본국에 항의하고 압박한 결과였다.
물론, 법적으로는 가능하게 되었어도 무서워서 실제로 이용하는 사람은 없었다.
세르비카 경은 세라비와 레이를 칼베르에 계신 위독한 어머니를 뵈러 가는 부잣집 아가씨와 하인으로 변장시켜 넘어가도록 할 예정이었다. 스칼하븐의 무서운 놈들이 귀족보다는 적당히 부유한 중산층을, 남자보다는 여자에게 좀 더 방심할 거라는 예측 때문이었다.
세르비카 경의 빠른 조치로, 아가씨와 하인의 가짜 신분증이 만들어지고, 통행 허가를 요청하는 이카리아 영사관의 서류도 발급되었다.
세르비카 경은 내심 자신의 아이디어가 마음에 들었으나, 세라비가 이카레이유에 도착하고 나서 세르비카 경은 계획의 전면적인 수정을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그것은, 아가씨 역을 해야 하는 세라비 때문이었다.
세라비는 귀부인 역할을 해내기에는 너무 농사꾼스러웠다. 《귀부인 아님》이라고 마차에 써붙이고 가는 것보다 더 의심받기 좋겠다고 세르비카 경은 생각했다.
그렇다면 저 마법사 놈을 부잣집 도련님으로 변장시켜서 내보내야 하나? 하지만, 스칼하븐 부대가 지키고 있는 포르트메르의 교역소를 통과하려면 어머니를 생각하며 울고 있는 도련님보다 아가씨가 가장 방심하기 쉬워 보였다. 세르비카 경은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왜 자기가 하녀 역할이냐고 항의하는 세라비에게 귀부인보다는 그쪽이 덜 예의를 차려도 된다고 설명하니 더 이상의 설득은 필요하지 않았다. 여장은 못 하겠다고 거절할 줄 알았던 레이도 순순히 “아무리 생각해도 그 역할을 할 사람은 저밖에 없는 것 같네요.” 라며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 이후로는 매우 순조로웠다.
이렇게 세르비카 경의 지휘하에 열심히 예행연습을 마친 세라비와 레이는 이튿날 새벽 마차를 타고 이카레이유 외곽으로 연결되는 길을 빠져나갔다. 레이첵은 세라비와 레이를 포르트메르까지 데려다주는 역할을 자청하여 같이 마차에 타고 있었다. 물론, 포르트메르까지만 데려다준다고 하면서 그대로 같이 가버릴 계획이었다.
세라비는 우선 플로르 왕자와 조우하기 위해 미리 약속한 장소인 포르트메르 교외의 여관으로 향했다. 비밀을 지켜달라는 왕자의 간청 때문에 세라비는 세르비카 경에게 말도 못 하고 모두 잠든 한밤중에 레이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왕자를 어떻게 하면 칼베르까지 무사히 데리고 갈 것인지 궁리했던 것이다.
뭐든 간에, 왕자가 이번 여행길에 별 도움이 안 되리라는 것은 확실했다.
레이는 왕자의 동행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귀하게 자라신 분이라 궂은일도 위험한 일도 못 할 것이고, 무엄한 놈들이 집적거리면 무례하다고 호통이나 안 치면 다행이겠네요. 게다가 신변에 위험이 생기면 저처럼 마법이나 무술을 할 줄 아는 것도 아니니 도움은 고사하고 말 그대로 걸리적거리기만 하겠네요.”
“그래도 왕자님인데 그런 식으로 말하면 못 쓰지.”하고 세라비는 레이를 나무랐지만 속으로는 동감했다.
“그래도 게로스 왕을 빨리 만나고 싶어서 열심히 따라오기는 할 거예요, 그렇죠?”하고 레이는 스스로 위안하듯 말했다.
이윽고 플로르 왕자와 코토란을 만난 세라비는 가슴이 턱 막혔다. 세라비들보다 하루 먼저 포르트메르에 와서 기다리고 있던 왕자와 시종은 그야말로 왕자님이시라 여행에 필요한 짐도 엄청나게 많이 가져왔던 것이었다.
“왕자님은 추위에 약하시기 때문에 이것과 이것도 필요하고,”하고 유모나 마찬가지로 왕자를 어릴 때부터 곁에서 돌봐온 코토란이 설명했다. “피부가 약하시기 때문에 순 이카리아 면으로 만든 내의밖에 못 입으신답니다. 그리고 아직 성장기이시니까 하루에 한 번씩 영양제를 챙겨 드셔야 합니다. 여드름이 생기지 않도록 지방이 많은 음식은 되도록 피해 주십시오.”
“다 좋은데, 시종 양반.” 세라비가 말했다. “우리는 지금 한시가 급한 상황인데 이 많은 짐을 다 싸들고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슈?”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꼭 필요한 것들만 챙겨가지고 왔습니다.” 코토란이 말했다.
“지방은 고사하고 밥도 잘 챙겨 먹지 못할 수도 있을 텐데 미안한 말이지만 왕자님 피부까지 챙겨드릴 여유는 없다는 건 좀 아셔야겠수.” 세라비가 잘라 말했다. 코토란의 얼굴이 걱정으로 하얗게 질렸다.
“자자 왕자님,”하고 레이가 플로르 왕자에게 상냥하게 말했다. “우리는 지금 게로스 임금님을 만나기 위해 한시가 급하답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저희가 말씀드리는 대로 잘 협조를 해 주셔야 해요.”
“게다가 위험해서 까딱 잘못하면 칼베르 가기도 전에 신의 곁으로 가게 될지도 모른다 이겁니다!”하고 왕자가 싸들고 온 짐 때문에 짜증이 난 세라비가 과격하게 말했다. 옆에서 듣고 있는 왕자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자 레이가 친절하게 달랬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저희 얘기에 잘 따라 주시면 게로스 임금님한테 빨리빨리 데려다 드릴게요. 전하도 빨리 그분을 뵙고 싶죠?”
왕자는 다시 얼굴이 밝아지며 얼굴을 끄덕였다. 세라비는 한숨을 쉬었다. ‘게로스 왕을 빨리’라는 말을 세 번이나 남발하며 왕자를 겨우 달랜 레이는 세라비에게 몰라도 너무 모른다고 불평했다.
“왕자님이라고 해도 아직 나이가 어리시니까 너무 심하게 말하면 겁부터 먹는단 말이에요!”
“알았어… 일단 저 과잉보호 시종부터 돌려보내자. 잔소리가 너무 많아서 무슨 일을 못하겠어. 하루라도 빨리 포르트메르를 통과해야지 아직도 여기서 이러고 있는 줄을 삼촌이 아시면 바로 쫓아오실 거야.”
그래서 세라비들은 걱정스러운 눈길로 왕자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서 있는 코토란을 뒤로하고 포르트메르 교역소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