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르 왕자 (1)
《세라비: 장하다 라를르의 딸》은 장편 소설입니다.
◆ 캐릭터 소개
◆ 처음 오신 분은 1화부터 읽어 주세요.
아침이 되자 세르비카 경이 세라비와 레이의 방 문 앞까지 찾아와서 빨리 준비하라고 재촉을 하는 바람에 세라비는 불쾌한 기분으로 잠에서 깨어났다.
“어서 일어나라 세라비!” 세르비카 경이 문밖에서 소리쳤다. “왕궁의 진짜 청소부들은 다들 이 시간에 출근한단 말이다. 그러니 너희들도 어서 준비해야지!”
“아니, 외교관으로 데뷔시켜 준다고 하시더니 이젠 청소부인가요?” 세라비가 물었다. “좋은 데 취직시켜 준다고 시골에서 억지로 올라오게 해 놓구선 이제 와서 다른 사정이 생겼다고 하시는 건 아니죠?”
세르비카 경은 웃지도 않았다. “밀사 주제에 사신이라고 써붙이고 입궁할 참이냐? 이제부터는 정말로 장난이 아니니까 부디 죽고 싶지 않으면 신분 감추는 습관 좀 들이거라. 너희는 오늘 청소부로 변장해서 왕궁에 들어간다. 자 어서 준비해라!”
어차피 출근길인 레이첵을 빼고, 세라비와 레이는 아직 잠이 덜 깨 졸린 얼굴로 팔레 에클라 측문의 출근 대열에 끼어 있었다. 위조 신분증에 출근도장을 받은 세라비와 레이는 깨끗한 에이프런에 머릿수건을 두른 채로 레이첵의 안내에 따라 위대한 이카리아의 국왕 마르셀 13세가 기다리고 있는 본궁으로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이렇게 안 해도 될 것 같은 복잡한 과정을 거쳐 세라비와 레이를 왕궁에 들인 것은 오스틴과 스칼하븐의 사신 일행의 눈을 두려워한 세르비카 경의 조심스러운 처사였다. 아무리 융숭하게 대접을 하며 시간을 끌어도 그들은 이카리아가 지원에 대한 확답도 주지 않고 차일피일 미루기만 하는 것을 상당히 불쾌하게 생각했다. 세르비카 경은 일부러 두 사신 일행들을 애매하게 가까운 거리에 머물게 함으로써 두 나라의 사신 일행들이 서로를 견제하느라 이카리아에서 시선을 조금이라도 돌리게 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본국에서 빨리 이카리아의 원조를 받아오라고 지속적으로 압박이 들어오는 탓에 사신들은 모두 신경이 매우 날카로워져 있었다.
세르비카 경이 세라비를 하루라도 빨리 칼베르에 보내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한 것은 이런 사정 때문이었다. 어떻게든 이카리아가 전쟁에 말려드는 것만은 막아 보겠다는 것이 마르셀 국왕의 확고한 의지였고 세르비카 경의 의지이기도 했다.
세르비카 경은 세라비와 레이가 위대한 국왕 마르셀 13세의 어전에 엎드려 인사를 올리는 것을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마법사 한 명이 일행에 추가된 것은 예정에 없었던 일이었으나, 세르비카 경은 국왕의 신뢰를 받는 인물이었으므로 마르셀 왕은 크게 문제를 삼지 않았다. 오히려, 세라비에게 경호원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정하고 격려하기까지 했다.
예의 없는 조카가 왕 앞에서 실수라도 할까 봐 밤잠을 설쳤던 세르비카 경은, 마르셀 왕이 세라비의 마치 동네 이장님 대하듯 하는 화법에 전혀 노하거나 동요하지 않는 모습을 보며 너그러우신 왕을 마음속으로 찬양하고 또 찬양했다.
위대한 왕은 짧은 알현이 끝나자 다시 휴식을 취하기 위해 자리를 떠났다. 이카리아와 칼베르의 공통 수호신인 강과 물의 여신 플레베르, 남풍의 신 쉬드르, 들판과 농사의 여신 퀼테베르를 모시는 왕립 신전에서 불려 온 사제가 세라비에게 파손방지 마법을 건 작은 나무상자에 든 뤼넬을 넘겨주었다.
이어서 칼베르의 역사와 지리와 기타 등등등등에 대한 브리핑으로 정신이 너덜너덜해진 세라비를 데리고 세르비카 경은 사신의 출장비와 기타 선지급 수당을 받으러 갔다. 레이와 레이첵도 그 뒤를 따랐다.
팔레 에클라의 복도를 걷고 있는 이들의 앞에 홀연히 젊은 시종 하나가 나타나 머리를 숙였다.
“아니 자네는 왕자님의 시종인 코토란이 아닌가!” 세르비카 경이 알아보고 이렇게 말했다. “왕자님께서 나에게 용건이 있으신가?”
“왕자님께서 이번에 떠나시는 사신단 일행을 꼭 뵙고 나라의 평화를 위해 긴히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십니다.” 시종이 말했다.
“오오, 역시 차기 국왕이 되실 분은 생각이 깊고도 넓으시도다. 얘 세라비야, 계획에는 없던 일이지만 왕자님까지 뵙게 생겼으니 제발, 부디 예의를 갖추어 뵙고 좋은 말씀 많이 듣고 오너라.”
세르비카 경은 세라비와 레이가 아직 청소부 복장을 하고 있음을 깨닫고 말했다. “갈아입을 옷이 어디 좀 있으면 좋으련만…”
“왕자님께서는 개의치 않으실 것입니다.”하고 코토란이 말했다. 세라비와 레이는 시종을 따라 왕자가 기다리고 있는 방으로 향했다.
세르비카 경도 따라 들어가려고 하였으나 코토란이 정중히 왕자님께서는 사신단만 긴히 뵙고자 하신다며 제지하였다. 세르비카 경은 자기가 없는 자리에서 세라비가 무슨 실수를 할지 몰라 레이첵을 대신 따라가게 했다. 다행히 코토란은 레이첵도 사신단의 일행이라고 착각한 모양인지 막지 않았다.
서운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세르비카 경은 역대 왕들의 초상화들이 걸려 있는 복도 한켠의 긴 의자에 잠시 앉아 기다렸다. 왕자는 아직 나이도 어리고 정치판에도 관여하지 않으니까 뭐 잘 다녀오라고 덕담이나 한마디 해주려는 모양이지, 하고 세르비카 경은 불안함을 달랬다.
‘이왕이면 세라비가 왕자님께 잘 보여서 나중에 왕비가 되면 더더욱 좋을 텐데…’하고 세르비카 경은 후회 가득한 마음으로 생각했다.
‘이런 일이 있을 줄 진작 알았더라면 세라비를 아침에 미용사한테라도 좀 보이고 올 것을…’
세르비카 경이 선대 왕들의 초상화 밑에서 이런저런 복잡한 꿍꿍이에 젖어 있는 동안, 세라비와 레이와 레이첵은 왕자님이 기다리고 있는 별실로 들어갔다.
세라비는 왕자 플로르에 대해서는 칼베르의 게로스 왕에 대한 것과 마찬가지로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오랫동안 자녀가 없었던 마르셀 왕과 플로렌틴 왕비 사이에 아기가 태어나자, 왕은 이 아이의 치세 하에 나라가 꽃처럼 번영하기를 염원하며 이름을 플로르라고 지었다.
오스틴과 스칼하븐이 무서운 공주들로 인해 싸움을 시작하게 되었을 무렵, 공주는 있었으나 이미 결혼한 다음이라 위기를 모면한 솔렌시아와, 역시 공주가 있긴 했으나 나이가 너무 어려 리스트에서 제외된 리스코바와는 달리, 일찍이 과부가 된 젊은 여왕이 지배하고 있던 티르윈은 여왕이 재혼 상대를 공표할 때까지 오스틴과 스칼하븐에 의해 경제봉쇄의 위기에 처한 적이 있었다.
이러한 소식을 접한 이카리아의 국민들은 우리는 공주가 없어 저런 일을 당하지 않아 다행이라고 기뻐하며, 플로르 왕자 덕분에 유지되는 평화를 칭송해 마지않았던 것이다.
세라비가 플로르 왕자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실은 여기까지였다. 왕궁에서 일하고 있던 레이첵조차도, 아직 나이가 어려 공식적인 행사에도 얼굴을 잘 내밀지 않는 이 왕자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지난 시험에서 왕자가 훌륭한 성적을 거두었다거나 하는 소소한 일들 뿐이었다.
왕자의 시종 코토란의 안내로 세라비와 레이, 레이첵은 플로르 왕자와 마주하게 되었다. 아직 어린아이 티가 가시지 않은 열다섯 살의 플로르 왕자는 왕자다운 의젓한 태도로 세라비들을 맞이하였다.
“이렇게 중대한 사명을 띠고 외국으로 나가시는 사신 일행을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왕자는 말했다. “이렇게 모시게 된 것은 이번 파견에 앞서 여러분께 꼭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마르셀 왕으로부터 넘치도록 충분한 부탁을 들은 터였지만 세라비는 고개를 숙이고 왕자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너무 갑작스럽게 들리시겠지만, 나는 이번 파견에 동행하고 싶습니다.”
세라비는 너무 놀라서 대답도 잊고 멍하니 왕자를 바라보았다. 레이첵 역시 왕자님의 말씀을 기록하던 펜을 멈추고 충격에 가득한 눈길을 왕자에게 던졌다. 왕자는 얼굴이 약간 붉어지며 헛기침을 했다.
“물론 내가 아바마마의 명으로 나라를 대표하는 여러분의 권한을 빼앗으려고 하는 것은 아님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사신단의 대표로 가고자 하는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내가 같이 가게 되어도 여러분은 여전히 이카리아의 대표입니다.”
말을 마친 왕자는 앞치마를 두르고 머릿수건을 쓴 청소부 복장의 세라비 앞에 갑자기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세라비는 허둥지둥 같이 무릎을 꿇고 제발 이러시지 말라고 애원했다. 그러나 플로르 왕자는 일어나지 않고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로 다시 한번 청했다.
“부디 저를 같이 가게 해 주십시오, 사신단의 대표이신 세르비카 양!”
세라비는 거의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어제 레이첵이 눈물 콧물을 흘리며 데려가 달라고 한 것 만도 놀라 자빠질 지경인데, 고귀하신 왕자님이 국왕이 위험수당까지 줘서 보내는 사신의 길에 자기 발로 같이 가겠다니. 왕자가 제정신이 아니거나 아니면 이 임무가 사실은 너도나도 가려고 하는 굉장히 편하고 재미있는 일인데 세르비카 경이 괜히 세라비를 겁주려고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세라비 님, 뭐 하세요? 왕자님이 무릎을 꿇고 계신데 계속 이렇게 두실 거예요?” 옆에서 조용히 구경하던 레이가 세라비의 앞치마 자락을 잡아당겼다.
세라비는 감히 왕자님의 청을 거절할 명분도 배짱도 없었기 때문에 어물어물 “전하께서 정 그러시다면… 뭐…”하고 얼버무렸다. 왕자는 기쁨에 넘쳐 세라비의 손을 잡고 감사의 말을 하기 시작했다.
왕자님이 무릎까지 꿇는 바람에 얼떨결에 수락하긴 했지만, 갈 길은 멀고 삼촌 몰래 레이첵도 데려가야 하는 상황에서 왕자님까지 모셔야 한다고 생각하니 세라비는 한없이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런 사정도 모르고 시종 코토란에게 떠날 채비를 할 것을 지시하고 있는 플로르 왕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레이의 머릿수건 속 얼굴에는 묘한 의문의 표정이 떠올랐다. 그는 세라비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세라비 님, 왕자님까지 동행하게 되셨으니 이제 우리 일행은 네 명으로 불어났네요. 이런 밀사의 길은 숫자가 많을수록 기동성이 떨어지죠. 그러니 우리도 국왕폐하께 말씀드려 수당도 더 받고 여행기간도 더 보장을 받아야 하지 않겠어요?”
국왕폐하라는 단어를 얼핏 들은 플로르 왕자는 갑자기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세라비에게 달려와 애처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 세르비카 양! 내가 세르비카 양을 따라가는 것은 물론 아바마마께는 비밀인 것 알고 계시겠지요! 아바마마께는 생뜨 크로페에 공부하러 간다고 말씀드려 놓았습니다. 제발 아바마마께는 비밀로 해 주십시오.”
“전하께서는 참으로 겸손하십니다.” 레이가 갑자기 침묵을 깨고 끼어들었다. “장차 국왕이 되실 분으로써 나라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길을 떠나시는 전하의 높은 뜻을 국왕폐하께서도 널리 이해하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아니, 절대로 안 됩니다.”하고 왕자가 황급히 말했다. “난 정말로 그저…”
“전하의 큰 뜻은 저희도 잘 알고 있습니다.” 웬일인지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레이의 말투에는 무언가 의도하는 것이 있었다. “안전이 보장된 왕궁을 버리고 나라를 위해 떠나시려는 전하의 깊은 뜻을 국민들이 본받기를 바랄 뿐입니다. 저는 단지, 전하께서 길을 떠나시려는 데에 나라를 위한 숭고한 이유 말고도 혹시, 혹시 아주 사소한 다른 이유라도 또 있으신지 궁금해서 여쭐 뿐입니다.”
세라비는 혼미해진 정신으로 “너 미쳤니? 전하께 대고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거야! 출발도 하기 전에 감옥부터 가고 싶냐!”하고 외치며 레이에게 달려들었고, 레이첵은 부들부들 떨며 그 자리에 주저앉는 가운데, 왕자 플로르의 앳된 얼굴은 마구 붉어졌다.
전하의 분노를 사서 감옥에 가는 줄 알고 기절하기 직전인 레이첵을 질질 끌고, 세라비는 모두 같이 감옥으로 끌려가기 전에 어서 사신의 길이라도 떠나 목숨이라도 보전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방을 나서려고 했다.
그때, 플로르 왕자의 울분에 찬 목소리가 세라비들의 발목을 잡았다.
“굳이 알고 싶다면, 나도 숨기지 않겠어!” 방금까지만 해도 의젓하게 나라를 걱정하던 왕자는 별안간 이렇게 외쳤다. 세라비는 왕자의 눈에 그렁그렁하게 맺힌 눈물을 보고 또 한 번 소스라치게 놀랐다.
코토란이 달려와 왕자에게 말리는 손짓을 해 보였으나 왕자는 뿌리치고 격앙된 목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부끄러워할 것도 없고 비밀에 부칠 것도 없이… 말하겠어요. 내가 칼베르에 가려고 하는 진짜 이유를!”
“전하! 체통을!” 코토란이 절망적으로 외쳤으나 이미 때는 너무 늦어 있었다. 세라비는 숨을 죽였고, 레이는 미소를 지었으며 레이첵은 기록장을 펼치고 받아쓸 준비를 했다가 코토란에서 손목을 한 대 얻어맞았다.
“나… 나도 게로스 님에게 가겠어! 그래서 칼베르에 가는 거야! 당신들이 데려가 주지 않아도, 나는 어떻게든 가고야 말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