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레나(完) 마침내 조용해진 한민석 가족

너밖에 없네

by 마봉

비는 한참 뒤에야 잦아들었다. 숲의 빗소리는 멈췄지만 바닥은 흠뻑 젖어 있었다. 엘레나의 사이렌 소리는 여전히 숲 속을 울리고 있었다.


수풀을 헤치고 마을 사람들 몇 명이 나타났다. 손에는 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오늘 프테리움 순 많이 낫겠어.”


“이런 날 따면 금방 가득 차지. 무쳐도 먹고 국도 끓이고…”


한 사람이 갑자기 멈춰 서서 귀를 기울였다.


“근데 이거 사이렌 소리 아녀? 여기서 왜 그 소리가 나지?”


그들은 저만치 나무 밑에 꿇어앉은 엘레나와 도윤을 발견하고 바구니를 집어던진 채 달려왔다.


“어이구야… 애가 쓰러졌네!”


“얘 노바리아네 아들 아녀?”


마을 사람들은 도윤의 상태를 급히 살폈다. 팔에 두드러기처럼 난 발진이 눈에 띄었다.


“프테리움에 긁혔나 보네.”


“아이고! 외지 애라 면역이 없구나.”


마을 사람들은 도윤을 일으켜 업었다. 엘레나는 갑자기 전원이 꺼지려는 듯이 축 처졌다.


“안드로이드도 거의 방전됐구만! 비 맞고 애 추울까 봐 발열 모드까지 켜놨네. 아이고! 뉘 집 안드로이드인지 착하기도 해라.”


엘레나가 그들을 향해 꺼져 가듯 되풀이했다. “의식 소실. 구조 요청.”


“어, 알았다! 여봐, 응급 드론 불러! 내가 애 볼게!”


마을 사람들은 손목에 찬 호출기를 켰다. “응급 드론 보내줘요! 사람 쓰러졌어요! 프리슈발트 숲 속이요!”


잠시 후, 숲 위로 드론형 응급 차량이 쏜살같이 날아왔다. 드론은 나무 사이를 뚫고 들어와 좁은 길 사이로 조심스럽게 내려앉았다. 도윤은 그대로 실려 나갔다.




도윤은 병원 침대에서 눈을 떴다. 천장은 하얗고, 눈이 시리지 않는 간접 조명이 은은하게 빛났다. 머리가 조금 띵한 것 말고는 아픈 곳은 없었다.


그리고 바로 눈앞에 두 얼굴이 나타났다.


“이놈아!”


눈이 빨간 엄마였다. 그 옆에는 숨이 좀 가빠 보이는 아빠가 서 있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집을 나가? 응급실에서 연락 와서 얼마나 놀랬는지 아니!”


도윤은 대답 대신 질문부터 했다. "엘레나는요?"


"엘레나 걱정부터 하냐, 이 녀석아!" 민석이 말했다. "점검 하느라 공장 들어갔다. 이 참에 관절도 갈아주기로 했다."


도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지연은 아들놈의 손을 붙들고 답답한 듯 외쳤다.


“어디 가서 뭐 하려고 했어!”


도윤은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브레일에…”


“뭐라고! 브레일! 천 킬로 떨어진 데를 너 혼자 가서 뭐 하려고!"


도윤은 침을 삼켰다. “브레일 대학 부속으로… 기숙사 있는 중등학교가 있어서…”


“보호자 없는 애를 입학시켜 주는 학교가 어딨니!” 지연이 소리쳤다. “생체 신분증에 누구네 집 애라고 다 쓰여있는데!”


민석도 소리쳤다. “돈도 없는데 어떻게 가려고 했어! 학교는 뭐 공짜로 받아준다던?”


“돈은…” 도윤이 우물우물 말했다. “대학 등록금 보태려고 노바리아에서부터 조금씩 모은 돈이 있어요.”


지연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이 녀석아… 그딴 거 때문에 집을 나가는 놈이 어디 있니...”


민석이 한숨을 길게 내쉬며 말했다. “아이고 이놈의 말도 오지게 안 듣는 아들놈아. 네 맘대로 너 가고 싶은 학교 보내줄 테니 다시는 그러지 마라.”


도윤의 눈이 커졌다. “정말요?”


“그래.” 민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거기도 공부 잘해야 간다더라. 아빠가 옆집에 사는 학교 선생님하고 얘기해 봤는데 거기도 마렐 농대만큼 성적 좋아야 간대.”


“공부는 열심히 하고 있어요.” 도윤이 말했다.


지연이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엄마아빤 네가 학교 안 가고 집에서 농사만 지어도 상관없다. 농대를 가든 공대를 가든 아예 안 가든.”


“하지만 엘레나를 개조하려면….”


“엘레나는 이미 구형이잖냐.” 민석이 말했다. “LN-A8까지 곧 나온댄다. 우리 엘레나는 1인데 벌써 8이 나온대. 네가 개조 안 해도 신형은 계속 나와.”


도윤의 대답은 단호했다. “엘레나가 제일 나아요. 6이나 7보다 기능은 적어도 내구성은 더 좋고, 여기처럼 습한 기후에서는 관절 갈아주고 패치만 잘해주면 앞으로 20년도 더 써요. 무엇보다도 5부터 빠진 수동 기능이…”


지연이 눈물을 거두고 허탈하게 웃었다.


“아이고… 벌써 공대생 다 됐네.”


“전 이미 아이디어가 다 있어요.” 도윤이 말했다.


“그래. 집에 가면 그 아이디언가 뭔가 엄마아빠도 좀 보여줘라.”


도윤은 누운 채로 슬쩍 웃었다.



도윤은 당일날 바로 퇴원했다. 일시적인 알레르기 반응이라 더 누워 있을 필요가 없다고 의사는 말했다.


이틀 후, 한 달에 한 번 있는 학교의 오프라인 수업 날이라 도윤은 스쿨버스를 타러 집을 나섰다. 지연은 스쿨버스 정류장으로 도윤을 배웅하러 나갔다.


“다녀올게요!”


도윤이 버스에 오르며 손을 흔들었다. 지연은 버스가 떠날 때까지 그 자리에 서서 마주 손을 흔들어 주었다.


집으로 돌아오니, 민석이 아직도 절뚝거리며 하우스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이구 내 팔자야.” 민석이 투덜거렸다. “고집불통 아들놈 때문에 늙어 죽을 때까지 혼자 농사짓게 생겼네. 그래 짓자 지어~ 뼈가 뽀사지게 지으면 되지 뭐가 문젠가~”


그는 하우스가 늘어선 쪽으로 향하며 소리쳤다. “그레이스!”


대형 하우스 관수 및 영양액 분사 로봇 GR-8S가 부드러운 기계음을 내며 가까이 다가왔다.


지연은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혀를 찼다.


“어디서 나왔겠냐 그 아들놈이! 농기계한테 사람 이름 지어주는 애비한테 나왔지. 뭐 하늘에서 떨어졌겠어?”


지연은 부엌으로 들어갔다. 자동 쿠커가 부드러운 소리를 내며 김을 뿜었다. 통합 주방 AI인 PE-TR9의 친절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스튜 조리가 완료되었습니다. 보온 모드로 전환됩니다.”


“그래. 30분 후에 밥 안쳐.”


“취사 예약 완료.” AI는 이어서 말했다. “커피를 드시는 시간입니다. 커피를 준비할까요?”


“그래. 추천 원두는?”


“오늘은 날씨가 갤 예정이니 오랜만에 산미가 있는 데메트리아 예가체프는 어떠십니까?”


지연은 미소를 지었다. “좋아. 지금 끓여.”


곧이어 머그잔에 갓 끓인 커피가 쪼로록 담겨 나왔다. 커피에서는 데메트리아의 비 온 후에 나는 신선한 흙냄새가 느껴졌다.


지연은 머그를 들고 김을 후 불며 말했다.


“고맙다 피터. 역시 너밖에 없네.”

평화로운 주방에서 커피를 마시는 지연의 모습

(끝이에용)

수요일 연재
이전 04화엘레나 4. 도윤의 가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