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의기쁨과슬픔 #비정기산문집
3월
06
나는 여름과 가을 사이를 좋아하는 사람인데 서점을 운영하니 겨울과 봄 사이도 좋다.
기온이 올라감에 따라 사람들에게서도 여유가 느껴진다. 인사 한 마디에, 표정 하나에 따스함이 담겨있다. 이렇게 좋은 볕을 내버려둘 수 없어 밖으로 나선다. 출근 전에 조금 일찍 나와 성북천 산책을 할 때가 있는데 밝은 곳을 따라가면 물이 흐르고 푸릇한 풀들이 자라있다. 양지란 그런 것이다. 발길을 저절로 이끌어 주는 것.
겨울과 봄 사이, 오늘의 아침은 조금 특별하다.
독립영화 촬영을 위해 서점 공간을 내어주었다. 자연광이 좋은 오전 시간에 산문집을 찾은 두 분. 배우 한 분과 촬영 감독 한 분이었다. 사실 대관 자체가 처음이라 고민을 했다. 서점원이 아닌 누군가에게 서점 공간을 빌려주는 것이 괜찮을까,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였다. 그럼에도 대관을 결정한 건 일단 내가 걱정할 새도 없게 배우분께서 친절한 설명을 덧붙여 주셨기 때문이 컸다. 정중하고 공손하게 그리고 목적을 분명하게 밝혀서 어떤 방식으로 촬영을 진행하는지까지 알려주셔서 고민을 덜었다.
이 분에게라면 우리 서점을 내어드려도 되겠어!
오전 10시부터 시작된 촬영의 주의 사항은 단 하나. 소리를 내지 말 것. 나는 카운터에 앉아 음악을 끄고, 조용히 책을 읽었다. 고요한 아침의 서점에서 들리는 건 배우분이 책을 들었다 놨다 하는 종이 소리뿐. 정적 속에서 나는 틈틈이 그들의 작업을 엿보았다.
배우분이 서점에서 책을 읽다 전화를 받고 밖으로 나가 통화를 이어가는 장면. 같은 장면을 다른 각도로 여러 번 찍는다. 풀샷도 찍고, 클로즈업도 찍고, 그녀가 선택한 책도 클로즈업하고, 안에서도 찍고, 밖에서도 찍고, 옆에서도 찍고, 정면에서도 찍고, 목소리도 따로 담고……
영화로 만들어진 후에 보면 3분도 채 되지 않는 아주 짧은 장면일 텐데 이 한 장면을 위해 그들은 두 시간가량을 쏟아냈다.
촬영이 어느 정도 끝나고 나서야 스몰토크를 나눌 수 있었는데 장비를 정리하면서 대화를 나눈 바, 두 분은 부부로 함께 70분 분량의 장편 영화를 준비하고 있었다. 기획도 같이 하고, 아이디어도 공유하고, 시나리오도 쓰고, 촬영과 연기까지 오롯이 두 사람이 모두 소화하고 있던 것.
심지어 일주일 중 5일은 다른 일을 하고, 이틀 동안 시간을 내어 짬짬이 영화를 찍으신다고. 이틀을 위해 5일을 일하는 사람들.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틀이 본업이 될 수도 있는 거다. 무언가를 좋아하는 것도 재능의 영역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를 이렇게까지 좋아한 적이 있었나. 나의 재능은 어디에.
생각해 보니 서점 역시 좋아하는 일을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하고 있지 않은가. 포기하는 것이 전혀 아쉽지 않다면 행복하게 일할 수 있겠지. 근데 포기해 버린 것이, 놓아버린 것이 절실하게 생각나면 어쩌지? 그때가 서점 문을 닫는 순간이 되려나.
영화의 내용은 한 여자의 선택에 관한 것이라고 했다.
선택.
그래서 나는 ‘두 분도 원하는 것을 선택해서 영화를 찍고 계신 거네요’라고 일러 주었다.
사실 그 선택이 맞는지 틀린 지는 중요하지 않다(심지어 맞는지 틀린 지 당장은 알지도 못한다). 그저 선택을 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니까.
누군가는 영화를 찍는 선택을, 누군가는 서점원이 되는 선택을 했다.
우리는 좋아하는 일을 하는 걸 선택했다. 그럼 조금은 재능이 있는 걸까. 그들도 나도 후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지금은 그 결과가 보이지 않을지라도 우리의 선택이 끝까지 남아 밝고 환하게 빛나기를. 양지바른 곳으로 발길을 이끌어 주기를.
2026년 3월 22일 일요일
언젠가 엔딩 크레디트에 장소로 소개될 산문집을 기대하며
서점원의 문장과 책
오늘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은 내일 그것을 이어서 만드는 사람과 같은 사람이 아니다.
『창조적 행위: 존재의 방식』 릭 루빈 지음, 정지현 옮김, 코쿤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