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왜 우리를 허무하게, 또 찬란하게 만드는가

사라짐의 미학, 그리고 그 끝에서 발견하는 삶의 절정

by 희온
IMG_4070.jpeg 가을 에세이, 희온


가능성의 계절 봄 VS 소멸의 계절 가을


바람의 결이 달라졌습니다.


아침저녁으로 코끝에 와닿는 공기는

'벌써 가을이 지나가고 있으니 이 순간을 더 즐겨'

라고 속삭이는 듯합니다.


그 속삭임 끝에는

늘 조급함과 아쉬움이 들리는 듯합니다.


가을이라는 계절은 유독

너그럽게 보내주질 못하겠거든요.


사람들은 흔히 봄이 짧다고 말합니다.

벚꽃은 흩날릴 준비도 하기 전에 져버리고,

연둣빛 새순은 금세 짙은 녹음이 되니까요.


하지만 봄의 짧음과 가을의 짧음은

제게 전혀 다른 무게로 다가옵니다.


봄은 짧아도 아쉽기보다 설렘이 큽니다.


새순이 싹트는 봄 뒤에는,

그 에너지를 이어받을 찬란한 여름과

풍요로운 가을이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봄은 '시작'이기에

그 뒤에 펼쳐질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을은 다릅니다.

가을은 '끝'을 예고합니다.


가을 뒤에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앙상한 나뭇가지와 스산한 바람이 부는 '겨울'뿐입니다.


모든 것이 마무리되고, 빛을 잃고, 침묵하는 시간.


그 명백한 소멸의 과정은 우리에게

짙은 허무함을 안겨줍니다.


'결국 모든 것은 사라지는구나.'

하는 본질적인 쓸쓸함이죠.




사라질 것이기에, 더욱 찬란하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합니다.


그토록 허무한 끝을 향해 가면서,

가을은 1년 중 가장 화려하고 농익은 색을 뽐냅니다.


봄의 아름다움이 '기대'의 아름다움이라면,

가을은 '절정'의 아름다움입니다.


봄부터 여름까지 차곡차곡 쌓아 올린 생명의 에너지를,

마지막 순간에 남김없이 불태우는 듯합니다.


온 산과 들이 일제히 붉고 노랗게 물드는 그 순간,

세상의 색깔이 통째로 변하는 장관은,

새순이 돋아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압도적인 울림을 줍니다.


어쩌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아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 모든 찬란함이 곧 사라질 것이라는 사실을.


그렇기에 가을은 허무하면서도 동시에

그토록 치명적으로 아름다운 것입니다.


유한하기에 더욱 소중하고,

끝을 알기에 더욱 빛나는 역설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짧기에 더 찬란한 이 가을을 마주하면,

문득 내 인생의 계절은 지금 어디쯤 와 있는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나는 지금 뜨거운 에너지를 쏟아붓는 여름을 지나고 있을까요,

아니면 나만의 절정을 향해 짙게 무르익는 가을의 초입에 서 있을까요.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끝이 결국 겨울이고,

어쩌면 삶의 끝이 허무일지라도,

가을은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 끝을 향해 가는 과정이 이토록 찬란할 수 있음을.




나의 가장 찬란한 절정을 피운다


시작의 설렘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그 끝이 정해져 있음을 알기에

오히려 더 치열하게 나만의 색으로 물드는

'가을'을 준비하고 싶은 마음.


어쩌면 우리가 가을에 이토록 애틋해지는 이유는,

언젠가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모든 것을 불태워

가장 빛나는 순간을 만들어내는 그 장엄한 '절정'에서

우리 삶의 가장 숭고한 모습을 발견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올가을, 유난히 아쉽고 소중하게 느껴지는 이 계절의 한복판에서,

저는 떨어지는 낙엽 한 잎, 파랗게 높아진 하늘 한 조각이라도

더 깊이 눈에 담아두려 합니다.


이 계절이 제게 건네는 무언의 응원을 기억하며,

내 인생의 가장 빛나는 가을을 향해 묵묵히 걸어가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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