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생굴의 위엄
수능 전날 시험 볼 학교에 미리 한 번 가봤다.
집과 굉장히 먼 곳이었는데 제2외국어를 안 보는 학교가 많지 않아 집에서 먼 학교에 배정됐었다. 제2외국어를 볼 걸 조금 후회가 됐다.
수능 날 아침.
새벽부터 엄마가 분주하게 도시락을 쌌다. 내가 좋아하는 반찬들과 소화하기 쉬운 죽을 싸주셨다. 아침으로는 어제 열심히 고아주신 장어탕을 먹었다.
일찍 준비를 마치고 엄마가 차를 태워주셨다. 그런데 그날따라 하필 네비를 잘못 봐서 두 번이나 같은 길을 뱅글뱅글 돌았다. 시간이 계속 가는데 정말 피가 바짝바짝 말랐다. 도착하자마자 전력질주를 다해 시험장으로 들어갔고 아슬아슬하게 시간 안에 도착했다. 내가 뒤에서 두 번째로 교실에 입실했다.
정말 큰일 날 뻔했다..
호흡을 가다듬고 마인드 컨트롤을 했다.
할 수 있어!!! 9월 모의고사 때처럼 하면 네가 원하는 교대 갈 수 있어! 파이팅!!
1교시는 국어였다.
다행히 EBS와 연계로 반 정도는 문제집에서 보던 지문들이 나와서 당황하지 않고 쉽게 문제를 풀 수 있었다. 31번 문제가 그해에도 핫한 어려운 문제였는데, 그 문제를 포함해 몇 문제를 제외하고는 그래도 내 페이스대로 잘 풀 수 있었다.
2교시 수리영역.
전혀 몰랐는데 제2외국어를 보지 않은 고사장의 경우 거의 예체능 학생들이 많았다. 예체능은 수리 점수를 반영하지 않는 대학들이 많아서 그런지 시험 시간에 잠을 자는 학생들도 있었고, 중간에 시험을 포기하고 나간 학생이 우리 교실에 2명이나 있었다. 수리영역도 어렵긴 했지만 9월 모의고사 정도여서 괜찮았다.
좋았어! 이대로면 문제없어!
드디어 점심시간!
고3 아이들은 같은 학교, 반 친구들과 옹기종기 모여서 식사를 했다. 나는 아는 사람이 없어 조용히 자리에 앉아 엄마가 싸주신 도시락을 먹었다. 아침 일찍부터 준비해 준 엄마의 사랑이 느껴졌다. 덕분에 3,4교시 시험을 볼 힘이 났다.
3교시 영어영역
영어는 내가 제일 자신 있는 영역이었다. 어른이 되고도 열심히 영어 공부를 해왔다. 또 호주, 영국에서 생활하며 다양한 억양도 익혀 듣기도 자신 있었다.
시험지를 받으려고 기다리는데 갑자기 배에서 신호가 왔다. 부글부글. 배가 부글 되기 시작했다. 밥이 잘못됐나.. 최대한 정신을 가다듬었다.
안 돼! 여기서 흔들리면 안 돼! 집중하자
시험지를 받고 듣기 평가가 시작됐다. 이번엔 속이 울렁거리면서 구역질이 나왔다. 위아래로 울렁울렁 부글부글 되니 정신이 혼미해지면서 영어가 잘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구역질 소리에 다른 학생들이 피해를 받을까 봐 그걸 참느라 정신을 집중할 수 없었다.
위와 배가 같이 요동을 쳤다. 정말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몸을 배배 꼬며 계속 의자에서 들썩들썩거렸다. (그날 내 교실에서 같이 시험을 본 학생들에게 정말 미안했다. 조용한 교실에서 다들 집중해서 문제를 푸는데 계속 소리는 내는 건 큰 방해였기 때문이다. 수능이 끝나고도 한동안 혹시나 나에게 컴플레인이나 소송이 걸리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ㅠ)
식은땀도 나기 시작했다. 2교시에 중간에 시험을 포기하고 나간 학생들이 생각나면서 몇 번이고 포기할까 고민했다. 하지만 나의 그간의 노력을 이런 것 하나로 망칠 수 없었다.
정말 악으로 깡으로 그 시간을 버텼다. 내가 자꾸 이상한 행동을 하니 시험관이 내 주변을 계속 서성이며 나를 체크하셨다. 나중에는 시험지가 하얗게 보여서 어떻게 풀었는지 기억도 안 났다.
종이치고 시험관이 시험지와 답안지를 걷어 확인한 후
"이제 밖..
라고 말하자마자 나는 입을 틀어막고 교실을 뛰쳐나갔다. 항상 쉬는 시간에 화장실에 사람이 많기에 나는 전력질주로 화장실에 달려갔다.
정말 얼마나 위아래로 뿜었는지 모르겠다…20분의 쉬는 시간이 끝날 때까지 거기에 그러고 있었다. 눈물이 조금 났다. 차라리 이 모든 게 꿈이었으면 좋겠다 싶었다.. 마음이 약해지려 했다. 뺨을 때리며 마음을 다시 다잡았다.
정신 차려! 너 여기서 다 포기할 거야?
죽는다는 각오로 하자!
정말 터덜터덜 기운이 다 빠진 채로 겨우 교실에 돌아와 그 자리에 앉았다.
마지막 4교시 사탐영역
자리에 앉아 시험지를 받자마자 다시 속이 울렁거리고 배가 부글댔다. 이번에도 정말 몇 번이고 포기하고 나갈까 생각했다. 정말 정신력 싸움이라고 밖에 할 말이 없다. 허벅지를 꼬집어가며 버텼다. 혼미한 상태에서 겨우 답안지를 다 채웠다.
시험관이 시험지와 답안지 확인을 마치자마자 나는 바로 화장실로 뛰어갔다.
모두가 시험을 마치고 돌아가고 나서도 한참을 화장실에서 나오지 못했다. 다리가 풀려 몸이 일으켜지지 않았다.
혼자 짐을 챙겨 터덜터덜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때부터 참았던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내 그간의 노력이 이렇게 물거품으로 다 사라진 거 같아 너무 슬펐다. 버스를 타고 돌아가는 길 다른 사람들 시선은 신경 쓰이지 않았다. 버스 안에서 그냥 꺼이꺼이 한참을 울었다.
왜 하필… 왜 하필…
세상이 쉽지 않다고 느꼈다.
한 번을 그냥 넘어가주지 않았다.
나는 그냥 선생님이 되고 싶었고, 그래서 최선을 다했는데..
집에 돌아오자 아빠가 계셨다. 아빠가
잘 봤어?
이 한마디에 다시 또 울음이 터져 소리 내서 한참을 울었다. 아빠는 말없이 나를 토닥여주셨다.
아빠의 위로를 받는 것도 잠시 집에 와서도 어김없이 위아래로 뿜었다..
그렇다..
나는 노로바이러스에 걸린 것이었다.
엄마의 특별식 자연산 생굴이 바로 그 범인이었다.
인터넷을 찾아봤다.
11월 생굴 조심.. 잠복기를 거쳐 12시간에서 48시간 안에 구토와 설사 증상 등이 나타난다.
수능 전엔 평소 먹던 것만 먹어라
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구나... 그날 이후로도 일주일을 더 아팠다.
엄마는 그 사실을 알고 안절부절못하셨다. 내가 엄마에게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엄마는 나를 잘 챙겨주려고 하신 것뿐이었다. 분명 안 먹을 수 있었는데 그 생각을 못한 내 잘못이 컸다. 자신 때문에 시험을 잘 못 봤다고 생각하면 엄마가 얼마나 두고두고 마음이 아플까.. 나는 괜찮다며 엄마를 달랬다.
수능 결과가 나올 때까지 시험지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냥 보고 싶지 않았다. 현실을 직면할 용기가 나지 않았던 것 같다. 1년 반 전 호텔 쪽 일을 그만두고 한참 집에 있었을 때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다시 마음이 쪼그라드는 기분이었다.
3주의 시간이 흘렀고 수능 결과가 나왔다.
과연 생굴 때문에 난리부르스를 친.. 내 수능 결과는 어떻게 나왔을까?
그리고 이 결과가 나를 어디로 이끌어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