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Five Vibes

너에게 바치는 나의 인디언 썸머.

가을에 찾아오는 짧은 여름

by 정짜리

9월, 공동 매거진이 시작되었다. 우리의 서막은 바로 인디언 썸머. 누군가의 참신한 아이디어로 정해진 9월의 주제였다. 공동매거진인 만큼 좀 더 색다른 글을 쓰고 싶던 나는 꽤나 열심히 인디언 썸머에 대해 조사했다. 몇 날며칠 소재가 떠오르길 기다렸지만, 엄마라는 말과 함께 잠들고 눈 뜨는 게 일상인 내게 기발한 아이디어는 쉽게 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하루 24시간, 나의 가장 큰 관심과 애정인 우리 아이가 나의 인디언 썸머 주인공이 될 수밖에.


일을 그만두고 나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그동안 고생했어”가 아닌 “왜 그만둔 거야? 너무 아깝다”였다. 그래서 직장을 관두고 나서도 꽤 오래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누구보다 그 사실을 내가 잘 알고 있으니까. 싱글 시절엔 일이 그렇게도 지겨웠다. 맨날 똑같은 비행, 시달리는 사회생활, 지겨운 손님들, 매번 잠자리가 바뀌는 호텔 라이프까지, 모두 싫었다. 그런데 임신과 동시에 비행을 멈추며 육아휴직까지 2년 이상을 쉬고 복직을 하니, 새삼 내 일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출근을 하면 육아와 집안일에서 벗어나 훌쩍 떠날 수 있고, 집을 벗어난 그곳에서 나만의 시간을 보내며 밥 걱정 없이 산책도, 와인도, 충분한 휴식도 모두 다 가능했다. 해외에서 리프레쉬 후 집에 돌아오면 아이와 남편이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 없었다. 그래서 모른 척했다.

나 대신 힘든 육아를 해주시는 몸이 불편한 엄마도, 돌봐줄 사람이 없어 밤늦게 3살 아이를 데리고 일하러 가기까지 했던 남편도, 지방에서 기차를 타며 우릴 도와주러 오셨던 시어머니까지. 아이가 클 때까지 조금만, 조금만 더 힘내주십사 하고 모른 척 바라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인디언 썸머처럼 11월의 따뜻했던 어느 날. 기내에서 일을 하는 데도 더워서 반팔 유니폼을 입고 했던 날이었다. 예정대로라면 한국에 오후 3시쯤 도착해야 하는 비행기가 이륙 전부터 활주로 상황으로 딜레이가 되고 있었다. 그날은 아무도 아이 하원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 무조건 내가 퇴근 후 바로 하원을 해야 했다. 그런데 비행기는 세 시간 가까이 딜레이가 되고 12시간이 넘는 비행 동안 따로 연락도 할 수 없으니 일하는 내내 난 너무 초조했다. 결국은 같은 워킹맘인 팀장님께 인천공항 도착 후 먼저 나갈 수 있도록 부탁드렸다. 팀장님은 이해해 주셨지만, 부팀장님은 곱지만은 않은 시선으로 내게 일과 사생활은 좀 구분하는 게 좋겠다고 한소리를 했다. 서러운 마음도 숨긴 채 다신 이런 일 없도록 하겠다며 사정사정 후, 인천공항에 도착해 승객이 내리자마자 나는 비행기에서 튀어나갔다. 말 그대로 비행기 문을 튀어나간 그때부터 입국심사 통과 후 주차장에서 차를 찾기까지, 그 넓은 인천공항을 뛰고 또 뛰었다. 차를 찾고는 인천공항 고속도로에서 분노의 질주를 하며 어린이집으로 달려갔다.


그렇게 도착한 어린이집 앞에는 이미 깜깜해진 11월의 저녁이 기다리고 있었다. 벨을 누르자 공동 거실만 희미하게 불이 켜져 있던 그곳에서 홀로 남아있던 아이를 원장 선생님이 데리고 나왔다. 4일 만에 만나는 아이였다. 늦게까지 아이를 기관에 맡겼다 찾아본 경험이 있는 부모는 알 것이다. 아이가 애타게 기다리던 엄마, 아빠를 만났을 때의 표정을.


안도감, 반가움, 기다림에 지친 서러움. 그 모든 것이 복합돼 있던 그날의 아이 얼굴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그날이 나의 인디언 썸머가 시작된 날이었던 것 같다. 나는 다시 못 올 내 아이의 유년시절을 아이와 함께 보내기로 결정했다. 일을 그만두며 내가 잃은 것도 많겠지, 하지만 일을 그만두고 아이와 함께 보내며 나와 아이의 남은 삶에 평생을 추억할 수 있는 시간을 얻는다면 이것도 꽤 나쁘지 않은 결정이다. 아이가 한 살, 한 살 크는 게 아쉬운 요즘이다. 조금만 더 천천히 커주길, 엄마 아빠에게 단꿈 같은 이 시간을 아이가 조금 더 달콤하게 누려주길.


가을에 찾아오는 짧은 여름이라는 뜻의 인디언 썸머는 삶이 우리에게 주는 작은 보너스라고 한다. 곧 사라질 것을 알기에 더 따뜻하고 더 아쉬운. 그러므로 나는 나에게 주어진 이 찬란한 인디언 썸머를 널 위해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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