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여름의 시계를 다시 돌려

Rhapsodic

by 김은채

사람들은 하루이틀이야 친절하다. 특히 사랑은 너무 좋은 명분이다. 그 안에서 모든 나를 품을 수 있다는 듯 굴어 준다. 감당은 의지의 영역이고, 노력해서 안 될 건 없다고 생각한다.


물러설지언정 모르지는 않겠다는 태도. 침묵은 거리감에서 비롯되고, 솔직함에는 애정이 깃든다 믿는다. 신념의 동기는 제각각이지만, 모종의 변화를 기다린다는 점에서 모두 같은 꿈을 꾸고 있는 셈이다.




권태로이 흐르는 정적은 까딱이는 초침의 움직임을 따라 그간의 신뢰에 착실히 흠집을 가한다. 울렁거리는 마음을 뒤로하고 끝끝내 속으로 삼켜낸 글자는, 서로를 좀먹는 상상에 가닿아 비로소 생동한다.


추억은 공동이지만 그 뒤는 각자의 몫. 거품이 꺼지듯 내려앉은 기대는 힘들여 외면했던 비관과의 보폭을 좁힌다. 기껏 달아오른 무모함에 불응하고, 가시 돋친 무뚝뚝함을 불러낸다.


얼룩으로 엉망이 되어 우그러진 진심은 다시는 마음을 다하는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세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최악의 패와 타협한다.




운명이 그대를 버렸다면 그대는 세상을 버려도 좋다. 회의로 가득한 광활의 공허를, 그대의 현명한 직관과 완벽한 옳음으로 채워라. 그렇게 그대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살아내라.




한데, 이상하지 않은가?


그대가 혐오하고 기피했던 세계의 불완전함은, 온통 그대의 것으로 비틀린 사랑을 닮았다.


아, 이 얼마나 벅차고 사랑스러운 모순인가!




상처는 흠이 아니라 구조다. 기대가 무너진 자리에 보다 단단한 지지를 새겨넣어, 너와 나를 잇는 우리가 된다.


그렇게 혼자라면 들어볼 수 없는 울림을 느끼고, 말해진 적 없는 감정을 접하고, 경험한 적 없는 황홀에 빠진다. 기뻐하고, 슬퍼하고, 화내고, 울고 또 웃으며 진하게 감동했다가 다시 우울에 걸려 엎어지길 반복한다.




마냥 달기만 한 것은 차오르지 않고, 온통 씁쓸한 것은 떠오르지 않는다. 영원이라는 환상에서 깨어나라. 재난처럼 밀려드는 후회를 넘어뜨리고, 한숨과 냉소의 입꼬리를 끌어내려라.


그토록 무의미하고 불합리한 세계이기에 우리 앞에 놓인 모든 우연이 너무나도 소중함을, 본능적 흐름을 역행하여 그대에게 당도한 배려가 당연하지 않음을 기억하라.







나는 그대와 세상을 연민한다. 미처 알지 못하는 당신의 그늘과 닿을 수 없는 너머의 시간까지도.


열흘 붉은 꽃은 없다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생각하지 말고, 구원이니 응원이니 공연히 비장해지지 말고, 잠깐이라도 좋으니 당신과 함께 걷고 싶다. 해가 익을 때까지, 달이 식을 때까지, 마침내 이 부조리의 끝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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