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셋하게 될 줄은 몰랐어
회사일에 한창 재미를 느끼고 성과내기 시작하던 대리급 시절, 언젠가 남편에게 이런 말을 한 적 있다. 내가 조직의 '장'이 되는 날이 오면 드라마에 나오는 멋진 커리어 우먼처럼 단정하고 세련된 숏컷을 하고, 내 몸에 꼭 맞는 정장을 입고 다닐 거라고. 그 이후로 '장'은 달았지만 숏컷은 끝끝내 실현하지 못했다. 출산과 동시에 불어버린 몸매로 숏컷을 했다가는 영락없이 '드센 아줌마' 상이 되어 버릴 것 같았기에. 인생은 참으로 수많은 변수의 집합체다.
퇴사하고 '도비'가 된지 6개월이 지났다. 특별히 뭔가를 제대로 한 게 없는 것 같은데 벌써 반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지난 10여 년간 나의 존재를 대신 증명해 주던 명함이 사라지니 그제야 진정한 나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들기 시작했다.
30대 후반이면 뭐라도 되어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다시 0부터 시작이라니! 기껏 키워 놓은 다마고치의 버튼을 잘못 눌러 세팅 값이 초기화된 느낌이다. 수많은 갈림길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날들이 매 순간,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지극히 개인적인 '퇴사한 자'의 4단계 심리 변화
1) 해방감 : 남들 다 출근할 때 출근하지 않는 자. 이 시간에 집에 있다는 것이 너무나 달콤하다. 짜릿하다. 그동안 시간이 없어 못 했던 걸 해보자며 의욕적으로 to do list를 작성한다. 아이와 놀거리를 연구하고, 저녁밥상도 푸짐하게 차려 놓는다.
"엄마는 왜 회사 안가?"라는 아이의 질문에 약간 당황했지만, "엄마는 이제 저 작은방에서 일해"라고 에둘러 설명한다. 소아과에서 만난 한 아이 엄마의 목에 걸려 있는 사원증에 눈길이 간다. 약간 부럽고, 약간 씁쓸하고, 약간 미련이 남은 것도 같다. 그래도 내게는 너무나 치열하고 고단한 기억뿐인 그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
2) 불안 초조 : 꼬박꼬박 들어오던 월급이 더 이상 들어오지 않는다. 맞벌이였던 가계 수입이 반토막이 됐다. 예전과 같은 소비 패턴을 이어가다간 거지꼴을 면치 못하리라. 아무래도 마음의 여유는 통장에서 나오는 것이 확실하다. 줄어드는 통장 잔고를 볼 때마다 내 선택에 대한 의구심이 찾아온다. 한창 열심히 일해서 생산성을 높여야 할 30대가 집에서 놀고 있는 것에 대한 이상한 부채감이 생긴다.
특히 남편에게 미안하다. 혼자만 무게를 지게 해서 미안하고 짠하다. 지금까지 늘 '내가 번 돈, 내가 쓴다'는 당당함이 있었다. 이제는 남편이 벌어 온 돈으로 살아야 하니 물건을 하나 사더라도 합리적인 소비인지 따져본다. 남편은 늘 괜찮다고 말한다. 그저 내 마음이 조금 찔리는 것 같다.
3) 우울 자책 : 가만히 있을 성미는 못돼서 집에서 할 수 있는 '무자본, 소자본창업' 부업거리에 기웃거려 본다. 말이 소자본이지, 돈 없으면 창업하면 안 될 것 같다.(*개인의견) 회사 다닐 때보다 더 치열하다. 내가 받던 월급만큼 순수익을 내려면 그야말로 24/7 몸을 갈아 넣어 일을 키워야 한다.
'집에서 애 보면서 간단하게 할 수 있는 일'이란 용돈보다 적은 수입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면 거의 환상에 가까운 것 같다. 냉정한 홀로서기의 세계에 살짝 발을 들이고 나서야 내가 몸담았던 회사원의 세계는 그래도 잘 갖춰진 온실에 가까웠다는 것을 깨닫는다.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는 날이 길어질수록 점점 사기는 저하되고 의욕은 떨어진다. 이번에도 또, 자기와의 싸움에서 지는 건가. 연이은 패배감이 자책감으로 번진다. 또다시 나 자신을 탓하는 나쁜 습관이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퇴사 후 첫 번째 침체기를 맞았다.
4) 수용 : 몇 번의 감정의 소용돌이들이 지나고 난 자리에 작은 깨달음들이 남았다.
(1) 처음부터 잘하려 하지 말 것. 내보이기 부끄럽고 허접해도 일단 시작해야 다음이 있다.
(2) 완벽주의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오래 끌고 있는다고 해서 완벽해지지도 않는다.
(3) 뭔가를 바라지 말고 그냥 할 것. 피곤해도 그냥 하고, 지겨워도 그냥 하고, 하기 싫어도 그냥 하다 보면 뭔가가 되어 있겠지.
(4) 남을 신경 쓰지 말 것. 100명에게 '좋은 사람'인 것보다 나 스스로에게 '좋은 사람'이 될 것.
(5) 내가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환경은, 생각보다 아주 큰 혜택인 것. 내게 주어진 소중한 시간을 엉뚱한 생각으로 낭비하지 말고 감사하게 여기며 발전적으로 살아갈 것.
실패가 아니다. 인생을 리디자인(redesign) 할 절호의 기회다.
한창 붐이 일었던 회귀 만화를 보면 주인공이 전생에서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고, 똑같은 상황으로 다시 태어나 전생과는 다른 전략을 펼치며 이번 생에선 시원한 사이다 전개를 만들어 간다.
30대 후반에 세팅 값이 0이 된 지금. 꽤 힘들었던 이전 삶을 마무리하고, 내가 원하는 삶의 모습으로 다시 살아갈 수 있는 두 번째 기회를 얻은 것이라고 생각해 보면 어떨까. 다행인 것은 이전의 기억과 경험치가 그대로 남아있어 똑같은 선택, 반복적인 실수를 막을 수 있을 것이란 기대다.
대학부터 직장 생활까지, 나는 사회가 정한 평균적인 시기에 맞춰 적당한 일들을 결정해왔다. 언제부턴가 이 직업이 나와 맞지 않을 수 있겠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지만 이미 오래 해버린 일, 그나마 가장 잘할 수 있고, 당장에 가장 높은 소득을 올릴 수 있는 일이 되어 버려서 끝내 놓지 못하고 있었다. 아마 육아라는 변수가 생기지 않았다면 지금까지도 나는 같은 삶을 반복하고 있었을 거다. 다 내려놓고 떠날 용기가 없었으니까.
이 나이에 아직도 진로 고민을 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이제라도 다시 제대로 하게 되어서 다행이다. 다 살았다기엔 아직 젊고, 순수하다기엔 이미 사회 경험은 해볼 만큼 해본 나이. 어렵게 얻은 나의 두 번째 인생, 멋있지 않아도 괜찮으니 이왕이면 '즐거운 인생'을 살아보겠노라고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