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킹맘 vs 전업주부 논쟁의 시작과 끝엔

여러분, 그건 우리의 잘못이 아니에요

by Lisa


"요즘 면접 자리에서 경단녀들 많이 보네요. 구직활동 힘들죠?"

"쉽진 않네요"

"강단이씨 마지막 답변이 기억에 남아요. 11년 살림한 경험이 우리 회사에 도움이 된다. 우리 회사가 강단이씨한테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죠?"

"그게.. 우선 서류를 보셔서 알겠지만 제가 예전부터.."

"아니요. 현재의 강단이씨요. 이 바닥이 참 많이 바뀌었어요. 감히 경력단절이니, 재취업이니 하면서 뭣도 모르고 소풍 가는 기분으로 올 자리가 아니라고요. 회사란 곳이"

"잠깐만요. 저도 저 나름대로 절박하게.."

"기분 나쁘게.. 내가 어떻게 지킨 직장인데. 이제와서 기어나와. 기어나오길"


2019년 방영한 tvN 드라마 <로맨스는 별책부록>의 한 장면이다. 명문대를 졸업하고 한때 광고대상까지 휩쓸며 우수한 성과를 냈던 주인공 강단이가 7년간 경단녀가 되었다가 다시 취업시장에 나와 면접을 본다.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여성 면접관과 화장실에서 우연히 만나 나누는 대화다.


마지막 대사가 나에겐 너무 충격적이어서 선명하게 기억한다. 오랜만에 다시 한번 같은 장면을 돌려봤다. 6년 만에 다시 들은 그 대사는 여전히 눈물 날 만큼 뼈가 시리고, 지나치게 현실적이어서 숨이 막힌다.



워킹맘 vs 전업주부. 끝나지 않을 논쟁, 왜 엄마들은 싸워야 하는가


"내가 그 업종에 오래 있었는데 확실히 워킹맘 자식들은 티가 난다"

"힘들면 그만두면 되잖아. 자기들이 돈 벌겠다고 선택한 거면서 그만 좀 징징거려라"

vs

"진상 엄마 열에 아홉은 전업주부더라"

"일 안 하는 엄마들은 내세울게 남편, 자식 자랑밖에 없다. 자기는 별 볼일 없으니까"


맘카페 또는 SNS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는 글이다. 모든 일에 편 가르기 좋아하는 한국 사회에서도 아주 유서 깊은 편 가르기 논쟁이 있다. 바로 워킹맘 vs 전업주부다. 엄마라는 같은 직업을 가졌으나 결정적인 순간에 확고한 이념 차이로 대립각을 세운다.


진짜 이상한 건 따로 있다. 워킹맘에게 적대적인 사람, 전업주부에게 적대적인 사람, 대체로 모두 다 같은 '엄마들'이라는 것이다. 지나가던 아저씨도, 옆집 할아버지도 아니다. 오직 엄마들끼리 서로 긁고 긁힌다. (나 역시 아주 여러 번 긁혔음을 고백한다.)



엄마 몸이 백 개였으면 좋겠어


회사에 출근해 일하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린다. 어린이집에서 걸려 온 전화다. "어머니, 아이가 아직 등원하지 않았어요" "네, 얼른 가라고 전하겠습니다" 참 이상했다. 아빠가 아이의 등원을 맡은지 1년째다. 그런데도 선생님은 아직도 엄마인 내게 전화해서 아이의 등원 여부를 확인한다. 나는 일을 멈추고 아이 아빠에게 연락해 위치를 확인하고 다시 선생님께 연락해 곧 도착할 것임을 전한다. 그냥 아이 아빠에게 바로 연락하면 모두가 편할 것을, 등원은 아빠 담당이라고 말씀드려도 꼭 전화는 내게 하셨다.


출퇴근 길에는 내일 먹을 식재료, 아이 반찬, 떨어진 생필품 등 재고를 미리 파악해 온라인 주문을 한다. 어린이집에서 보내온 알림장도 확인하고, 행사 일정, 선생님과의 소통, 챙겨 보내야 할 준비물 등을 확인한다. 다가오는 가족 대소사가 있으면 올해는 어떤 이벤트를 할지, 용돈은 얼마를 할지, 케이크는 어디에서 주문할지 인터넷 서치를 시작한다. 시간이 여의치 않을 때는 남편에게 일을 나누어준다. 대신 아주 구체적으로 지령을 주어야 엉뚱한 결과물을 가져오지 않는다. 엄마의 머리가 24시간 풀가동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회사에서도 나만 찾고, 집에서도 나만 찾고, 아이는 하루에도 수 백 번씩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를 외쳐댄다. 귀에서 이명이 날 지경이다. 아이도, 남편도 동시다발적으로 나를 불러댈 때 자포자기하듯 내뱉는다. "엄마 몸이 백 개였으면 좋겠어"


이렇듯 엄마들의 업무는 회사일과 육아, 가사로 끝나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숨은 노동, 집안의 재고 관리, 스케줄 관리, 가족 챙김 업무까지 대부분 엄마들의 몫이다. 솔직히 센스와 섬세함 영역만 놓고 봤을 때 엄마들이 집안일을 챙기는 것이 훨씬 나은 결과를 가져올 때가 실제로 많다. 그래서일까. 엄마는 회사에 다니면서도 육아와 가사를 놓지 못한다. 아빠가 육아와 가사를 '도와주면' 가정적이고 자상한, 유니콘 남편이라고 박수를 받는다.



한국 여성들이 왜 아이를 낳지 않는가


지난해 영국의 공영 방송 BBC가 1년에 걸쳐 한국 전역을 돌며 한국 여성들을 인터뷰한 분석 기사가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한국 여성이 왜 아이를 낳지 않는가> 제목도 직관적이다. BBC는 저출산 문제에 대해 주거비, 과도한 사교육, 치열한 경쟁 사회 등 여러 문제를 지적했지만 핵심은 결국 하나였다.


한국 경제가 지난 50년간 고속 발전하면서 여성을 고등 교육과 일터로 밀어 넣고 야망을 키워줬지만 아내와 어머니의 역할은 같은 속도로 발전하지 못했다.


이 문장을 읽을 때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 가끔은 내가 맡은 역할이 너무 많아 삶이 무겁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었다. 좋은 딸, 좋은 아내, 좋은 엄마, 착한 며느리, 성실한 직원. 실제로는 그리 훌륭한 사람이 아님에도 나는 좋은 사람이라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강했던 것 같다. 주어진 역할을 똑 부러지게 해내는 슈퍼맘이라도 되고 싶었던 모양이다.


옛말에 뱁새가 황새 따라가면 가랑이가 찢어진다고 하던가. 모든 것을 다 잘하려다가 결국 모든 것을 다 잃을 뻔한 위기를 겪고 나니 이제는 편안하게 인정할 수 있게 됐다. 나는 그리 특출나지도, 모나지도 않은, 적당히 평범하고, 그냥 그런 보통의 사람. 어떤 건 잘하고, 어떤 건 아주 형편없고, 그냥 적당히 구멍 많은 사람. 제풀에 지쳐 두 손 가득 쥔 욕심을 내려놓고 나서야 깨닫게 된 아주 값비싼 교훈이다.


신이 모든 곳에 존재할 수 없어서 엄마라는 존재를 만들었다고 하던데. 결국 엄마도 일개 인간일 뿐, 신이 아니지 않나. 인간은 신이 될 수 없다. 그러니 우리, 적당히만 잘하면 된다.



사실은 위로와 공감이 필요한 사람들


도입부에서 워킹맘과 전업주부가 서로에게 날 선 반응을 보인다고 했지만,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는, 사실은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응원하고 부러워한다. 늘 시간에 쫓기며 죄책감을 안고 사는 워킹맘은 아이를 직접 케어하고 자기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전업주부를 때때로 부러워한다. 누구 아내, 누구 엄마의 역할에 회의감을 느낀 전업주부는 내 이름 걸고 당당하게 일하는 워킹맘을 때때로 부러워한다. 그렇게 엄마들은 사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는 서로를 갈망하며 조용한 응원을 보내고 있다.


아이 낳고도 자기 일을 해내는 멋진 사람, 가족들의 안전한 안식처가 되어주는 따뜻한 사람. 엄마들은 그 존재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역할을 해내고 있다.


일하는 엄마 vs 일 안 하는 엄마로 구분 지어 편 가르기 전에, 여성들이 일과 가정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사회구조적인 문제부터 들여다봐야 하지 않을까. 일과 육아를 동시에 이어가는 게 어렵지 않은 사회에선 애초에 이런 논쟁거리가 성립할 이유가 없다. 무엇을 하든 개인의 선택이 될 테니까.


하지만 우리나라처럼 아직까지도 나의 커리어를 '버티고 지켜내야 하는' 세상이 계속된다면,

조금은 억울하게 자의반 타의반으로 내 커리어를 '포기해야 하는' 세상이 계속된다면,

워킹맘 vs 전업주부의 자존심 대결은 아주 오래도록 끝나지 않을 것만 같다.


여러분, 그건 우리의 잘못이 아니에요.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 나를 위해서 한 번쯤은 "잘했다, 수고했다" 위로를 건네주세요. 오늘도 이 땅의 엄마, 아빠들. 고생 많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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