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하면 망할 것 같은 두려움

의외로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by Lisa


늦은 밤, 유난히 고단한 하루를 보낸 날이면 어김없이 알바찾기 앱을 설치했다. 내가 상상하는 이상적인 파트타이머 생활은 아이를 등원시키고 한적한 카페, 혹은 간단한 사무보조 일을 하는 회사로 출근해 열심히 일하고 오후 4시에 퇴근해 아이를 하원 시키는, 아주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모습이다.


그러나 현실은? 당연히 가능할 리가 없다.



30대 주부를 환영해 주는 곳은 '콜센터'뿐


알바 앱의 스크롤을 한참 내려도 퇴사하고 할 수 있을 만한 일은 안 보인다. 고용주 입장에서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만 일하는 비효율적인 고용 형태를 제시할리도 만무하다. 그나마 무자격, 주부 환영이라고 적힌 곳은 콜센터 아니면 주방 홀서빙, 물류센터 알바 정도다.


그마저도 근무시간은 아주 이른 아침부터 시작하거나, 늦은 밤까지 일하거나, 주말에도 일한다. 아침부터 밤까지 꼬박 12시간 일하는 조건도 있다. 급여는 당연히 최저시급. 근무조건은 더 열악해지는 데 급여는 대폭 삭감되는 신기한 현상을 눈으로 확인한 후에야 "내일 출근해서 열심히 일해야지" 다짐한다.



삶에 물음표가 많아지는 순간


그럼에도 때때로 마음속에 물음표가 새겨질 때가 있다. 하루 일과 중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시간을 회사에서 일하거나, 회사로 이동하는 데 쓴다. 회사에 다니기 위해 사는 사람처럼 내 시간을 거의 올인하다시피 쏟고 있다. 가족과의 시간, 아이와의 시간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다. 문제는, 10년 후를 상상해도 딱히 그려지는 미래가 없다는 것이다.


10년 후에도 이 일을 하고 싶은가? No.

10년 후에도 지금처럼 살고 싶은가? No.

꼭 회사에서 돈을 벌어야 하는가? No.

회사에 다니지 않고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 있는가? No idea.


어쩌면 마음속에 이미 정답을 내놓고, 더 이상 회사에 다니지 않아도 될 101가지 이유를 찾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놓치 못했던 이유


말끔하게 누가 봐도 직장인처럼 다니는 것이 좋았다. 아이에게 엄마가 회사에 다닌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게 좋았다. '내가 일해서 번 돈'이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때때로 느끼는 직업적 성취감이 좋았다.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 가져야 하는 것도 좋았다. 나를 찾는, 나를 원하는 곳이 있다는 것이 좋았다. 이 모든 것들은 "나 아직 살아있어"라는 존재의 증명과 안도감과 같은 것이었다.


반대로, 회사 밖을 나가게 되면 모든 것을 잃게 될까 두려웠다. 재취업을 한다고 한들 지금까지 쌓아 온 경력, 근무조건 모두 다시는 갖기 어려울 것 같았다. 맞벌이의 한 축이 사라졌으니 경제적 타격이 있진 않을까 두려웠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게 막막했다. 세상이 더 이상 나를 필요로 하지 않을 것 같은, 낙오되어 버릴 것 같은 마음이 일었다.


그래서 버텼다. 아슬아슬하게 쌓아 올린 모래성이 무너질까 노심초사하며 더 쌓아 올리지도, 차마 부수 지도 못하는 상태로.



그리고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퇴사는 했지만 망하진 않았다. 당연하게도. 내가 상상했던 그 어떤 최악의 상황도 일어나지 않았다. 가족들도 모두 나의 결정을 격려해 주었고, 이제는 전 직장이 된 회사 동료들도 모두 그 자리에 그대로, 좋은 친구이자 동료로 남아있다. 나의 경력도 어디 도망가진 않는다. 같은 업계로 가지 않더라도 그간 쌓아 온 역량을 토대로 다른 갈래의 분야로 새롭게 배워 도전해 볼 수도 있다. 경제적 타격도 생각보다 적었다. 기분 따라 충동적으로 결제했던 불필요한 소비가 사라지니 오히려 판단력이 뚜렷해졌다.


무엇보다 큰 소득은 나의 회복이다. 바닥까지 고갈됐던 나의 마음에 조금씩 '하고 싶은 것'들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잊고 살았던 작은 성취들을 하나씩 이뤄내면서, 아기가 걸음마를 시작하듯, 다시 온전한 나 자신으로서 살아가는 법을 연습하고 있다.


돌아보면 그리 대단하지도 않았던 것들을 부둥켜안고서, 그것마저 놓으면 다 잃게 될까봐 전전긍긍했다. 때로는 나를 옭아매는 무거운 미련에서 벗어나야만, 다음으로 향하는 새로운 힘이 생긴다는 것을 이제는 알게 됐다.


뭔가 잘못됐다는 경고음이 들릴 땐 무시하지 말고 잠깐 멈춰서 점검해 보기. 한 가지 길만 있다고 맹신하지 않기. 스스로의 능력을 과소평가하지 말기. 작은 실패 하나로 인생이 실패한 것처럼 과몰입하지 않기.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나는 더 괜찮은 사람임을 알아주기. 스스로 감싸주고 사랑해 주기. 오늘도 나와 건강하게 화해하기는 현재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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