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꼬운 당신, 우리 잘 살아봅시다
얼마 전, 드디어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폭싹 속았수다>를 모두 시청했다. 드라마 한 편 보는 데 참 오래 걸렸다. 원래도 눈물이 많은 편인데 그 드라마만 보면 눈이 퉁퉁 불도록 울게 돼 쉽사리 시청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폭싹 속았수다>를 시청한 사람들은 대부분 '부모님의 헌신적인 사랑'에 대해 깊이 깨닫게 된다고 한다. 나 역시 그랬다. 그러나 내 눈에 더 깊이 들어온 모습은 따로 있다. 세월이 흘러도 언제나 애순만을 바라보는 '양관식' 보다도, 그의 옆에서 언제나 씩씩하게 힘을 주며 100% 믿음을 보여주는 '오애순'의 태도다.
언제부터였을까. 당신이 '육아동지'가 된 것이
아이가 생긴 후로는 모든 것을 셋이 함께 하는 일상이 당연해졌다. 세 식구가 함께 하고 있을 때 비로소 완성됐다는 안정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로 인해 얻는 행복감도 무척이나 크다.
그러다가 아주 가끔씩 아이 없이 둘만의 시간이 생길 때가 있다. 대화 주제는 항상 '아이' 또는 '가족'이다. 마치 지금 이 순간도 셋이서 함께 하고 있는 것처럼 아이 이야기로 거의 모든 대화를 채운다. 남들은 신랑과도 자주 데이트를 한다는데, 나는 이제 데이트는 어떻게 하는 건지, 연인의 감정은 어떤 것이었는지 조금은 가물가물한 것도 같다.
솔직히 말하면, 아이가 태어난 순간부터 나의 1순위는 이미 '아이'로 변해버렸다. 돌전 아기 시기에는 나를 돌보는 것보다도 아이 키우는 일에 더 열을 올렸을 정도니, 그 와중에 남편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내 눈은 항상 아이를 향하고 있었고, 남편의 눈은 나를 향하고 있었다.
때때로 남편은 내가 아이에게 하는 것처럼 본인에게도 관심을 주기를 바랐다. 그럴 때마다 이 사람이 남편인지, 손 많이 가는 큰아들인지 헷갈리기도 했다. 일하고 육아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치는데 왜 다 큰 성인을 돌봐줘야 하는지 짜증이 난 적도 있다. 이제 와 돌아보니 정작 스스로를 돌보지 않은 것은 나 자신이었는데 말이다.
나는 당신에게 한 번이라도 '오애순'이 되어 준적이 있을까
"늬들은 사업하고 사고 칠 때 언제 엄마, 아버지하고 상의했어? 모르면 물어야 돼? 제발 가만히만 있어? 어디서 감히, 어디서 감히! 아버지 인생 무시하지마. 아버지는 하루도 자기 위해 안 산 사람이야"
평생을 성실하게 살아온 양관식이 어느 날 대차게 사고를 친다. 일명 '떴다방'에 당한 것. 보기 좋게 사기를 당하고 온 관식에게 아들 은명이가 버릇없이 대들자, 관식의 아내 애순은 자식에게 큰소리로 호통친다. 아버지의 인생을 무시하지 말라고.
드라마 속 애순이는 언제나 그랬다. 인생의 궂은일, 힘든 일이 닥쳐도 특유의 긍정적인 사고로 관식에게 용기를 주며 함께 잘해보자고 위로했다. 가난하고 가진 것 없지만 그 삶 속에도 어떻게든 잘 살아보기 위해 웃음 지으며 씩씩하게 살아간다. 나는 그런 애순이의 모습이 참 예뻐 보였다. 내가 양관식이라도 저런 아내와 함께라면 어떤 일이 생겨도 잘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쇠'처럼 말이다.
나는 과연 당신에게 그런 아내가 되어줬을까. 무조건적으로 당신을 믿고, 당신은 잘 해낼 거라며 용기를 주고, 세상 모두가 등을 돌려도 유일한 내 편이 되어줄 거라는 확신을 주었던 적이 있는가. "나는 무엇보다 네가 더 중요해"라고 말해주던 당신에게 나는 진정으로 위로와 힘이 되어 준 적이 있는가. 관식을 대하는 애순의 태도를 보며 나의 지난날을 돌아보게 됐다. 그리고 또 많이 반성했다.
아꼬운 당신, 오늘도 폭싹 속았수다
아이가 다섯 살이 되자 우리 삶에도 조금은 숨통이 트였다. 부모 자신을 돌보지 않는 육아는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아이보다도 나 스스로를 먼저 돌보고 내 삶의 만족감을 느끼는 것이 궁극적으로 우리 가족이 행복해지는 길이라는 것을 잘 알게 됐다.
숨 한 번 고르고 나니 이제서야 남편의 모습이 보인다. 언제나 묵묵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나의 남편. 꾸미기 좋아하던 당신이 이제는 아저씨가 다 됐다며 편한 것을 찾아다닌다. 머리에는 희끗희끗 새치가 언제 저렇게 많이 올라왔을까.
그동안 나의 힘듦만 생각하느라 당신의 힘듦을 미처 보지 못해서, 미안하다. 당신이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님을, 영원한 것이 아님을. 이번 생은 서로의 반려가 되어 주기로 결심했으니 사는 동안 외롭지 않게, 쓸쓸하지 않게 복작복작 잘 살아보자고, 서로에게 애순이와 관식이가 되어주자고.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당신을 위해서 "아꼬운 당신, 우리 건강하게 행복하게 잘 살아보자"고 다짐해 보는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