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 없는 삶은 결국 무너진다

지금까지는 나의 이야기, 이제부터는 우리의 이야기

by Lisa


육아 친화적인 기업으로 이직했다. 회사가 아이 키우는 사람을 이해하고 공감해 준다는 것은 생경한 경험이었다. 더 이상 육아는 페널티가 아니었다. 육아 경험이 오히려 메리트가 되는 느낌이었다.


딱 한 가지의 단점을 제외하고는. 처음부터 각오하고 있었고 견딜 수 있는 단점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치명적인 단점으로 돌아오기 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부동산 폭등, 서울 변두리로 밀려난 신혼부부


2019년 결혼한 우리는 서울 중남부에 위치한 작은 평수의 신혼집에서 시작했다. 코로나19 시국 속에서 아기가 태어났다. 육아용품으로 점점 집이 가득 채워져 갔다. 하루 종일 아기와 단둘이 집 안에만 갇혀 있으려니 답답함도 함께 커져갔다. 보다 넓은 집으로의 이사를 고려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먼저, 살고 있던 동네의 매물부터 찾아봤다. 그런데 불과 3년 사이에 부동산 시세가 말도 안 되게 치솟아 있었다. 중개인 말로는 족히 2~3억씩은 올랐을 거란다. 근로소득으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였다. 우리가 가진 예산으로 20평 중후반대의 집을 얻으려면 저기 언덕 꼭대기, 나보다 나이가 많은 노후 주택 밖에는 선택지가 없었다. 자연스럽게 옆 동네로, 그 옆 동네로, 점점 발품의 범위가 넓어졌다.


그렇게 찾다 보니 서울의 끝자락까지 오게 됐다. 통근 거리를 고려해 지하철로 이동이 가능한 서울의 외곽 지역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하게 됐다.



비(非)강남인의 애환


첫 직장과의 거리는 멀지 않아서 괜찮았다. 문제는 두 번째 직장이었다. 편도 1시간 30분, 왕복으로 3시간이다. 같은 서울 하늘 아래서 1시간 30분이나 걸린다는 것이 놀라웠다. 거리 때문에 이직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지만 아직 겪어보지 않았으니 한번 도전해 보자고 다짐했다.


출퇴근 거리가 1시간 늘어났을 뿐인데 밀려오는 피로감은 상상 이상이었다. 가장 복잡한 2호선 출퇴근 시간의 지하철은 생지옥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지체하면 집에 도착하는 시간 또한 곱절로 늘어난다. 비좁은 지하철에 몸을 끼워 넣고 육아 교대를 위해 달려간다.


통근 거리를 줄이기 위해 여러 가지 방안을 진지하게 고민했다. 이제 갓 입사한 회사를 위해서 온 가족의 생활권을 옮겨올 수도 없었고, 오직 회사 출퇴근을 목적으로 불안정한 주거 환경을 선택할 이유도 없었다. 그저 해내는 수밖에. 억대 연봉을 받는 평생직장이라면 모를까, 그도 아니지 않은가. 보장된 것 하나 없이 나 하나 때문에 충동적인 결정을 내릴 순 없었다.


이런 고민이 누군가에겐 우스워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대한민국 30대 청년 중 주거 걱정 없이 아름답기만 한 미래를 그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저 그만큼의 유산을 물려받지 못했고, 그만큼의 높은 소득을 벌어들일 만큼 유능하지 못하니 지금 내가 가진 것에 만족하며 살자고 마음을 정리했다.



아이와의 시간이 고작 하루 1시간


유연근무제를 활용할 수 있으니 아이 등원을 내가 맡게 됐다. 아이를 등원 차량에 태우고 회사에 출근하면 10시 30분. 8시간 근무를 하고 7시 30분에 칼퇴한다 해도 집에 도착하면 밤 9시다. 9시 전에 꼬박꼬박 잠을 자던 아이의 취침 시간도 엄마의 퇴근이 늦어짐에 따라 점점 뒤로 밀려났다.


깜깜한 밤이 되어 집에 도착해서 아이를 재우고, 밀린 집안일을 처리한다. 일을 다 끝내고 샤워까지 마치면 금세 12시. 기나긴 하루 중에 아이와 살 비빌 수 있는 시간은 고작 1시간 남짓이다. 오늘 너의 하루는 어땠는지, 어떤 반찬이 맛있었는지, 누구와 어떤 놀이를 했는지, 눈 맞추며 따뜻하게 이야기 나누고 싶지만 현실은 말처럼 쉽지 않았다. 다정함은 체력에서 나온다고 하던가. 체력이 바닥까지 소진되니 그저 아이가 빨리 잠들기 만을 기다렸다.


평일에 시간을 함께하지 못하니 주말에는 대부분 아이와 시간을 보내는데 집중했다. 우리의 의지도 있었지만, 어차피 육아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조력자도 없었다. 주말에도 시터님을 고용해 쉬는 시간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 생각도 해봤다. 그럴 때마다 '그럼 도대체 우리 아이는 엄마 아빠와 언제 놀아?' 하는 생각이 들어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아이에게 미안함이 커질수록 아이와 보내는 주말을 잘 보내기 위한 의무감도 커져갔다.


오래된 휴대폰 배터리는 100% 충전해도 금방 닳아버리는 것처럼, 우리의 에너지는 아주 빠른 속도로 고갈되고 있었다. 5% 남은 상태에서 충전기를 꽂아 겨우 전원을 연명하는 것 같은 생활이 매일 반복됐다.



예민의 화살이 결국 아이에게 향했을 때


잠을 못 자고, 쉬지 못하고, 늘 머리를 쓰고, 일하다 보니 그야말로 이제는 빈 껍데기만 남은 사람처럼 생기를 잃어갔다. 웃음기가 사라지고 눈에는 자주 눈물이 맺혔다. 살고 싶어 사는 것이 아니라 살아야 해서 사는 사람처럼 하루를 버텨냈다. 여기서 멈추면 모든 것이 무너질 것 같은 두려움이 일었다.


지쳐가는 엄마와 달리 아이는 점점 건강하게 자라서 체력이 늘어나고 장난기도 부쩍 늘었다. 엄마는 아이의 애교 섞인 장난을 받아줄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아이에게 다그치고 화를 내는 날들이 잦아졌다. 사소한 것에도 아주 쉽게 짜증이 나고 별것도 아닌 일에 사납게 화를 냈다.


그럴 때마다 내가 느낀 죄책감과 자기 혐오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내가 아무리 화를 내도 아이는 나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고, 나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유일한 존재. 밖에선 괜찮은 척 살아가고, 세상에서 가장 약하고 여린 존재인 너에게 네 잘못도 아닌 일로 화풀이 해대는 나의 모습을 마주할 때마다 수치스러웠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아이 키울 그릇도 안되면서 괜히 낳아서 상처만 주는 건 아닐까. 결혼을 하지 말았어야 했나. 아니 그냥 애초에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나의 몸과 마음이 무너져갈수록 나의 가족들도 함께 힘들어지고 있음을 느꼈다. 우리가 잘 살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살아야 했다. 어떻게든 부정적 감정의 고리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정신건강의학과의 도움을 받았다. 처방약을 먹으면서 나의 마음도 점차 안정을 되찾아갔다.



결국, 도망친 곳에도 낙원은 없었다


퇴사를 결정했다. 직장인 10년 차, 워킹맘으로 산지 꼬박 3년 차였다. 재취업 계획은 없었다.


2017년쯤인가, 당시 화제작이었던《82년생 김지영》책을 읽고 열정 넘치는 20대였던 나는 열변을 토했다. "책이 과장된 것 아니냐, 우리의 시대는 달라지고 있다"라고 말했던 것 같다. 그로부터 8년 뒤, 나는 퇴사했고, 집에서 아이를 키우며 작은 소일거리들을 찾아 일하는 뚜렷한 명함 없는 아이 엄마가 됐다. 강산이 한 번 변할 할 만큼 세월이 흘렀지만 세상은 무섭도록 제자리에 멈춰있다.


혼자만 일하는 아이 아빠가 안쓰러워 이제라도 다시 재취업해서 맞벌이 할까 고민도 한다. 그럴 때마다 선택의 문제가 붙잡는다. 다시 일하고 아이는 학원 뺑뺑이를 돌리거나 시터님께 맡기거나, 아니면 조금 아끼면서 살고 아이와 충분한 시간을 보내거나. 시간과 돈,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일도 하고 아이도 내가 돌보는 건 정말 욕심일까. 남들 다 아무렇지 않게 잘 해내는데 내가 단단하지 못해서 무너진 걸까. 조금만 더 견뎠으면 괜찮았을까. 여러 가지 생각이 여전히 꼬리를 물고 이어지지만, 퇴사 후 아이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너무 소중하고 행복해서 꿈에서 깨고 싶지 않은 기분이다.


이 시대 맞벌이 부모들은 늘 시간이 부족하다. 내가 아이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간절히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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