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앉은 것에 대하여

사라지지 않는 흔적

by 나그네

손에 들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입속으로 들어 가, 말이 되기보다는 그저 삼켜졌을지도 모른다.

몸짓 하나에 찢겨 아무 소리 없이 사라졌을지도.

그러 다면, 훨씬 쉬웠을까?

하지만 만약, 정말 만약 누군가에게 닿을 수 있다면.

이 허우적대는 몸짓들, 의미 없이 흩어지는 이 모든 것들이..

사실은 완전히 무의미한 게 아니었다고, 믿고 싶었다.


칼바람이 쉴 새 없이 불어오던 날, 세상은 얼어붙은 듯 고요했다.

말소리도, 눈빛도, 숨결조차도. 모두가 멈춘 것처럼.

그때,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짐승의 울음인지, 사람의 절규인지, 아니면 내 안에서 터져 나온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하늘을 가르며 날아가는 새 무리. 어딘가로 도망치는

듯한 그중 한 마리가 조그만 무언가를 떨어뜨렸다.

툭. 돌멩이처럼, 아니 그보다 더 조용하게, 물가에 떨어졌다.


작은 인형이었다.


그리고 그 인형은... 아주 천천히, 아무것도 닿지 않는 깊은 곳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 아래, 마른눈 하나가 떠 있었다. 눈은 이미 오래된 것처럼 굳어 있었고, 그 눈빛은 말없이 하얀 그림자 하 나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눈 속엔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고,

그 무 엇도 더 이상 그 눈을 움직일 수 없을 것 같았다."


시간이 흘렀다.

살을 에던 바람은 어느새 풀 내음 섞인 따스한 기운으로 바뀌어 있었다.


가라앉았던 인형은.. 언제가 시작이었는지도 모른 체 깊은 곳에서 어렴풋이 보이는 하얀 그림자를 따라 걷 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길은 험난했다. 짐승에게 물린 것인지, 어디 에 부딪힌 것인지, 아니면 무엇인가에 걸려 찢긴 것인 지 알 수 없었다. 인형은 이제 형태를 겨우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망가져 있었다.

마치 죽을 날을 미리 받아놓은 시한부처럼,


그 인형은 멈추지 않고 하얀 그림자를 따라 걷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닿을 수 있을 듯, 멀어졌다. 가까워졌 다가, 다시 멀어졌다.

꼭 이카로스의 날개처럼. 조금만 더. 정말, 조금만 더 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 끝은 언제나 하얀빛무리였다.


그러던 중, 바람이 스쳤을까? 끝을 알 수 없는 곳에서, 마치 고대 유적지를 지키는 거대한 수호자처럼, 무언 가 거대한 물체가 지나갔다.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 인형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마치 분수대의 물처럼, 아래에서 위로 솟구쳐 오르는 것처럼.

그리고 흘러 다니던 나뭇가지 같은 것에 걸려 다시 흘 어갔다.


이번엔, 어디선가 사람의 말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점차 그 소리가 가까워졌다. 어부였다.


어부는 흘러가는 인형을 집어 들었다. 인형은 움직이 지 못했지만, 하얀 그림자를 움켜준 듯, 마른눈에 생기 가 돌기 시작한 듯 보였다.


그러나, 허락된 시간이 끝이 다가오는 것인지, 겨우 형 태만 유지했던 그 인형은, 빛의 속도처럼 통각이 사라 지고 넝마 같은 옷도, 생기를 돌게 했던 눈마저 색을 잃 기 시작했다.


시간의 끝이 지나고, 어부의 손에는 차가운 온기만 남 앗다. 그리고 그 인형은... 진실로 하얀 그림자를 움켜

쥐었다


시한부처럼 남은 시간을 살던 인형은 말도 못 하고, 스 스로 움직이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 인형은 결국, 그 하 얀 그림자를 움켜잡았다.


마치 절망 속에서도 무엇인 가를 붙잡으려는 마지막 몸부림처럼...

그 순간, 생각했다.

종종 가라앉고, 흐려지고, 무너져 내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형태로든 무엇인가를 붙잡으려 한다.

그것이 희망일 수도, 사랑일 수도, 단지 삶을 있어가려는 본능일 수도 있다.


인형은, 그 하얀 그림자를 쥔 채로 결국 소멸했다.

하지만 그 소멸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붙잡고 싶어 한다.


그저 그 순간을 지나고 나면, 우리에게도 또 다른 시작이 있지 않을까.


어쩌면, 우리는 인형과 다르지 않다.

끝없이 가라앉고 흐려지면서도, 그 하얀 그림자처럼 무엇인가를 믿고, 붙잡으려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믿음이야 말로 우리에게 주어진 새로운 시작의 기회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