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는 자만이 교육을 할 수 있다
학생을 지도할 때 자주 하는 실수가 있다. 학생의 마음과 현재의 지적 상태, 수준, 그리고 무엇보다 공부에 대한 자세와 태도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겉으로 드러나는 과제 이행도나 수행 능력의 결과만을 보고 가혹하게 몰아붙이는 경우다. 특히 어린 학생일수록 중년의 남성이 굵은 목소리로 권위적으로 다가올 때, 여린 마음은 상처 입기 쉽다.
학생이 미숙하거나 게으르고 집중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아직은 다듬어지지 않은 존재이며 경험도 부족하고 마음도 여린 어린 학생이기에, 어른의 기준으로 판단하고 비난하는 것은 공평하지 않다. 마치 네 살 아이에게 정직, 근면, 성실함을 강요하거나 강아지에게 인간의 윤리적 기준을 요구하는 것처럼 부조리하다.
교육자에게는 기다림의 지혜가 필요하다. 누구에게나 각자의 리듬이 있고, 달리기에서 자신만의 페이스를 잃으면 결승선에 도달하기 어려운 것처럼, 학생마다 지적 능력이나 학습 속도, 의지의 강도는 다르다. 이를 무시하고 자신의 페이스에만 맞추어 학습자를 몰아세우면 서로에게 감정만 상하고 결과도 좋지 않다.
공부에 대한 의지가 없고 수동적이며 불성실한 학생은 예외다. 이런 경우에는 학습의 효과를 기대할 수 없기에 학부모와 상의하여 학원을 그만두는 방향을 제안하는 것이 낫다. 목적과 방향이 다른 이들이 같은 공간에서 머무는 것은 서로에게 고통이기 때문이다.
작은 이익을 위해 자신을 속이는 행위는 교육자로서의 나의 신념과 양심에 어긋난다. 나는 기다림이야말로 교육의 본질이라고 믿는다. 신 역시 우리가 어리숙하고 미숙하더라도 평생에 걸쳐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기다려 주신다. 그것이 기독교 신학에서 말하는 구원 이후의 성화(sanctification), 영화(glorification)의 과정이다. 우리의 죄와 실수투성이의 삶조차도 용서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 그분의 사랑이다.
키에르케고르는 믿음은 모순 속에서 기다리는 것이라고 했다. 아들을 바치라는 명령을 받고도 묵묵히 순종하며 기다린 아브라함을 그는 믿음의 기사라고 불렀다. 실존주의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은 "기다림은 희망을 품은 자만이 할 수 있는 능동적 행위"라 하며, "희망 없는 기다림은 절망이며, 진정한 기다림은 상대의 존재를 신뢰하는 사랑의 행위"라고 말했다. 참으로 울림 있는 말이다.
학생을 기다리는 행위는 결국, 그 학생이 언젠가 자신의 속도와 방식으로 깨어날 것을 신뢰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신뢰는 곧 사랑이다. 기다리는 자만이 교육할 수 있다. 그리고 기다리는 자만이 사람을 진정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이것이 내가 믿는 교육의 본질이며, 내가 실천하고자 하는 교육자의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