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랜 시간 영어를 공부해 왔다. 단순한 학습자를 넘어, 누군가를 가르치는 위치에 있었고, 오랫동안 학원 원장으로 살아왔다. 그런 위치에 있다 보면, 언어는 어느새 소통의 도구라기보다 ‘증명의 무기’가 되기 쉽다. 나의 영어 실력은 곧 나의 자격을 증명해야 하는 수단이 되었고, 특히 듣기 능력은 가장 쉽게 드러나는 실력의 바로미터처럼 여겨졌다. 그래서일까. 나는 언제부턴가 영어를 들을 때마다, 듣는다는 행위 자체보다 ‘다 들어야 한다’는 강박에 붙잡혀 있는 나를 발견하곤 했다.
TED와 같은 강연 영상에서는 화자의 발음이 분명하고 구조가 논리적이기에 비교적 쉽게 몰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영화나 팝송처럼 일상에 가까운 텍스트를 접할 때면, 단어가 들리지 않거나 문장이 흐릿하게 지나가고, 나는 그때마다 위축되었다. “이걸 못 듣는 나는 부족한 걸까?”, “내가 영어를 가르칠 자격이 있을까?”—나는 듣기의 실패를 존재의 실패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시 질문하게 되었다. 나는 정말 듣지 못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오히려 너무 열심히 들으려 하기에, 진짜 듣지 못하고 있는 걸까? 그리고 더 근본적으로는, ‘잘 듣는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우리는 누구나 원어민으로 살아가면서도 모든 말을 정확하게 듣고 해석하며 살아가지 않는다. 한국어로 된 뉴스에서, 누군가의 빠른 말투 속에서, 또는 소음 속의 대화에서 우리는 단어 하나하나를 다 듣지 않는다. 우리는 문맥을 따라가고, 감정의 흐름을 읽으며, 발화의 목적과 분위기를 통해 의미를 파악한다. 듣기란 언제나 ‘생략과 추론, 감각과 맥락의 종합’이다.
영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데 왜 유독 외국어를 들을 때만은, 모든 것을 완벽히 들어야 한다는 강박에 휘말리는가? 어쩌면 그것은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시선과 연결된 존재의 불안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닐까. 특히 오랫동안 입시 영어의 구조 속에서 살아온 나로서는, 언어가 ‘표현의 자유’가 아니라 ‘능력의 척도’로 작동해 왔고, 그로 인해 ‘다 듣지 못하면 나 자신이 불완전하다’는 깊은 무의식을 내면화했는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나는 이제, 듣기의 태도를 근본적으로 바꾸고 싶다. 더 이상 모든 문장을 다 듣겠다는 강박이 아니라, 말하는 이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가, 그 말의 의도는 어디에 있는가, 그 리듬과 감정의 결은 무엇인가를 중심에 두고 듣고 싶다.
전문 동시통역사 김태훈은 이렇게 말했다.
“통역은 단어를 옮기는 게 아니라, 개념을 전달하는 것이다.”
“단어를 다 듣지 못해도 상관없다. 핵심은 ‘이 말이 왜 나왔는가’를 감지하고 그것을 의미 단위로 옮기는 것이다.”
이 말은 나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실제 동시통역사조차 단어 하나하나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들은 맥락을 듣고, 흐름을 타며, 말의 구조 안에서 개념을 붙잡는다. 그렇다면 나 역시, 듣기의 핵심은 단어가 아니라 의미, 발음이 아니라 의도, 문장의 정확성이 아니라 대화의 방향성이라는 태도를 배워야 하지 않을까.
나는 이제 듣기를 성과가 아닌 사유의 방식으로 받아들이고자 한다.
모든 문장을 듣는 것은 불가능하고, 또 필요하지도 않다.
오히려 의미를 좇는 집중 속에서, 우리는 더 깊이 듣게 된다.
놓치는 말들 속에서도 맥락을 붙잡고, 이해를 이어가며, ‘듣는 나’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진정한 청취이고, 언어와 존재가 만나는 자리다.
듣지 못했다는 이유로 나를 책망하던 시간을 멈추고,
이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들으려는 나의 태도’ 자체가 가장 중요한 언어의 행위임을 믿고 싶다.
나는 더 이상, 다 들으려 하지 않는다.
대신 더 깊이 들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