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저히 죽을 수가 없다.

by 마른틈

어렸던 나는 꽤 비정한 삶을 살아왔지만, 이제는 그것들을 글로도, 말로도 덤덤히 털어놓을 수 있을 만큼 괜찮아졌다고 믿는다.

그러나 근래에 밀려온 감정의 파고는 막아도 막아도 봇물처럼 터져 나와, 나는 그것을 말로도 글로도 옮길 수 없었다. 단 한 문장, 단어 앞에도 눈물이 차올라 버거웠다. 그 마음들을 가만히 담고, 쌓아내다가 마침내 고장 나버렸을 때야 이 모든 것을 끝내기로 마음먹은 거다.


나는 마지막을 정해두었다. 내가 왜 매일같이 아큐웨더를 째려보았겠는가.

그러니까 나의 마지막은, 단언컨대 눈이 오는 겨울 제주바다에 잠기는 일이었다. 오롯이 그것만이 나의 마지막 소원이었다.

나는 수영따윈 하지 못하는 멍청한 몸뚱이를 가졌으니까, 한참 낮아진 수온 속에서 몸에 걸친 털옷이 물기를 머금어 촘촘히 짜인 실들이 얼기설기 엉켜 무게를 더하면, 그리하여 몸을 무겁게 짓누르면, 후회해 봐야 이미 늦은 일인 거다. 나의 아둔한 용기는 그곳까지만 닿아주면 충분했다.


그러면 차가운 겨울 바다와 하얀 눈송이, 죽기 전에 한 번은 꼭 보고 싶었던 그 장면이 나를 데려가줄 거야.


그러니까 사실을 고하건대, 요즘 내가 쓰는 여행에세이는 유서였다. 아주 길고 지지부진하며 주절주절하기 그지없는 재미없는 유서. 그저 죽기 전까지도 민폐를 끼치고 싶진 않은, 병신같이 모지란 마음으로 최소한의 울타리를 쳐두았지만서도.

그런데 나는 갑자기 죽기 싫어졌다. 떠나겠다 결심하고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고작 두 달 남짓한 시간 동안 세상이 조금 살만해졌다.


아, 나는 조금 많이 억울했다. 화도 났다. 이렇게 괜찮아질 거였다면 조금만 더 일찍 좋아질 것을. 모든 것이 되돌릴 수 없이 망가졌다 믿고 내려놓았더니 왜 이제와 내게 이러는 거야? 세상에는 아직도 이토록 기쁘고 단 것이 있다고, 왜 하필 이제 와서. 왜?

나는 이미 너무 힘들었는데, 지쳐 쓰러져버렸는데. 내 세계는 줄곧 암전이었는데, 왜 자꾸 빛을 들이밀어? 그럴 거였으면 진작 그랬어야지, 왜 그랬어? 나한테 왜? 나는 주체도 없는 것을 붙들고 원망하고 화냈다.


요즘 나는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 여전히 잠식해 오는 슬픔에는 면역이 없지만, 날마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해가 뜨고 지는 일에 사유를 느낀다. 아직도 대부분의 밤은 무용하게 느껴질 때가 많지만, 어떤 밤들은 꽤 괜찮은 밤이라 생각한다. 오늘은 문득, 이제야 내가 내쉬는 숨이 조금은 가치 있다고 여겼다. 나는 꽤 오랜 기간 그 숨한 톨조차 이 세상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 쓰레기 같은 인간이라 여겼으니 고무적인 일이다.


요즘은 살다 살다 참 별소리를 다 듣는다. 내가 무려 우리 대표님의 비타민이랜다. 대표님이 그랬다. 장난 아니고 진심이라고 강조해서 두 번이나 말씀하셨다. 고맙다고도 하셨다. 우리 대표님은 아직도 내가 대문자 E인 줄 아신다.

표님은 나를 볼 때마다 확신에 찬 표정으로 "내가 마른틈이 수입수출의 왕으로 만들어주께!"라고 하시는데, 오늘은 "대표님 쫌만 기다려보세요. 제가 대표님 경쟁사 차려드릴게요."라고 했다. 참고로 나는 누울 자리를 보고 뻗는 사람이다.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일이라 어렵지 않은 것이 없고, 눈을 돌리면 온통 모르는 무역 영어뿐이다. 그렇지만 그분은 나를 유달리 예뻐하시고, 나 역시 우리 대표님이 정말 좋은 사람이라 생각한다. 그분께 도움이 되고 싶고, 새로운 일을 배우는 것도 꽤 재밌다. 그토록 찾던 '쓸모'를 진정으로 찾아주신 나의 대표님께 무궁한 감사를.


나의 H 이야기도 빠질 수 없다. H는 나를 자꾸 울린다. 매일 울린다. 웃기는 사람인데 자꾸 울린다. 나는 오늘 또 울었다. 진짜 못됐다. 아냐, 사실은 정말 다정한 사람이다.



아, 나는 결국 또 이렇게, 죽을 수 없게 되었구나.

나의 귀인들에게서 받은 사랑과 다정을, 그들처럼 누군가에게 건넬 수 있으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할 테니.


하지만 나는 계속 쓸 거다. 다만 유서가 아니게 되었을 뿐. 내 울타리 속에서 모든 마음과 감정을 토할 거다. 그리고 보란듯이 잘 살 거다. 진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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