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지계(履霜之戒) 2

by 몽중몽

*


노을이 기울고 창호지 너머로 남은 빛이 희멀겋게 번지는 시각이었다. 방 안에는 등잔이 몇 개 켜져 있었고, 하인들이 오가며 빗자루질을 하거나 화로에 숯을 얹는 소리가 조용히 이어졌다.

낙리는 책상 앞에 서서 종이들을 가지런히 추리고 있었다.

붓으로 쓴 글자들이 빼곡하게 들어찬 종이였다. 그는 한 장을 들어 훑어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잠깐 눈길을 멈췄다.

‘1년 남짓한 사이에 필체가 많이 좋아졌군.’

예전에는 획이 가볍고 일정하지 않아 글자마다 들뜬 기색이 역력했는데, 이제는 중심이 잡혀 있었다. 그동안 나름대로 노력을 한 것이 분명했다.

낙리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종이 귀퉁이가 바스락 소리와 함께 접혔다.

그는 잠시 그대로 있다가, 천천히 손을 폈다. 손바닥으로 구김을 두어 번 밀어냈다. 주름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그 종이를 다른 장들 위에 나란히 얹고, 시선을 거두었다.



다시 한동안 정리를 계속하고 있을 때, 방문이 열렸다.

낙리는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내려놓고 돌아섰다.

찬 바람이 먼저 들어오고, 뒤이어 영유가 들어섰다.

“리야, 많이 기다렸어?”

낙리는 그 목소리에 그린 듯이 웃어 보였다.

“아닙니다.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요. 그리 기다리지는 않았습니다.”

낙리는 영유의 눈을 보지 않고 서가(書架) 위를 가볍게 매만지며 물었다.

“저녁 식사는 잘 하셨습니까?”

“응, 잘 먹었어.”

“그럼…….”

낙리가 고개를 돌려 서가 쪽을 보았다.

“이제 내일 예습을 좀 하시겠습니까? 다음 장은 내용이 적지 않아서 미리 보아두시면 편하실 겁니다.”

영유는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다른 말을 하였다.

“그것보다, 추 장사가 너 찾던데.”

낙리의 손이 잠깐 멈췄다.

이내 다시 움직였지만, 아까보다 조금 굳어 있었다.

“……추 장사님이요?”

“응. 너 만나고 싶다더라고.”

낙리가 의아한 표정을 지을 때, 문 옆에 서 있던 호위가 조용히 덧붙였다.

“심부름시킬 일이 있다 하셨어요.”

“심부름……이요?”

낙리의 시선이 잠시 허공에 머물렀다.


*


추홍의 방 안에는 어딘가 눌린 듯 한 공기가 있었다. 책상 위에는 서신으로 보이는 종이들이 여러 겹으로 쌓여 있었고, 촛불이 그것들의 그림자를 벽 위로 길게 드리웠다.

추홍은 의자에 등을 기댄 채였으나 시선은 낙리가 아닌, 서신 더미에 가 있었다. 낙리는 그 맞은편에 단정히 선 채, 추홍의 얼굴보다 조금 아래인 책상 모서리 언저리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병부상서댁에요?”

낙리가 되물었다. 목소리에는 뜻밖이라는 기색만 실려 있었다.

“그렇지.”

추홍이 짧게 대꾸하며 미간을 좁혔다.

“승상 대인께서 그 사람에게 따로 자리를 청하셨었지. 그런데 거절을 하지 않았나.”

그는 코웃음을 쳤다.

“어제는 편지까지 보내셨는데, 들고 간 하인을 그냥 문전박대해 버렸네.”

“조정의 대신이란 분이 예의를 모르시는군요.”

낙리는 짐짓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아무리 뜻이 다르다 해도, 지나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네한테 한 번 다녀오라고 하는 것이야.”

추홍은 그제야 낙리에게 시선을 돌리며 책상 위의 서신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나름 서생(書生)인 자네까지 그렇게 내쫓지는 못하겠지. 게다가 자네, 그 사람과 먼 친척이었지?”

낙리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가 풀렸다. 그는 곤란하다는 듯이 잠깐 머뭇거리다가 답했다.

“……몇 년 전까지는 그런 친척이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추 장사님께 들어서 처음 알았지요.”

그리고 덧붙였다.

“그분도 저 같은 사람을 친척이라 여기지는 않으실 겁니다.”

“그야 그렇겠지.”

추홍이 담담하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전에 그쪽에서 한 번 아는 척도 했었다 하지 않았나. 아예 무시는 못할 것이야.”

그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대인께서도 말씀하셨네. 만나자는 것은 어차피 거절당할 것이라고. 그래도 좋으니, 가서 집안 분위기라도 살피고 오게.”

낙리는 곤란한 듯 잠깐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제가 도움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낙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추홍은 낙리를 다시 보지 않은 채 서신을 내밀었다.

“일단 다녀오게.”

낙리의 눈동자가 아주 잠시 추홍의 얼굴에 머물렀다 바닥으로 향했다.

“예. 곧바로 채비를 하겠습니다.”

밖에서 바람 소리가 들렸다. 창호지가 가볍게 떨렸다.


*

내당(內堂) 안쪽으로 놓인 촛대 두 개가 나란히 타오르고 있었다. 저녁 냉기가 문틈으로 스며드는 탓에 불꽃이 이따금씩 가늘게 흔들렸다. 염온은 방 한쪽에 무릎을 꿇고 앉아, 두 아가씨 앞에 그림들을 펼쳐 두었다.

비단 위에 그린 화조도였다. 봄빛을 담은 홍매화 가지에 한 쌍의 새가 앉아 있었고, 옆에는 연꽃 사이로 물총새가 날개를 접은 그림이, 그 곁에 다시 모란과 나비를 담은 그림이 차례로 놓여 있었다.

큰아가씨가 먼저 그림 한 장을 들어 올렸다. 눈가에 조용한 미소가 번졌다.

“꽃이 여간 고운 게 아니네.”

작은아가씨가 곧바로 고개를 뻗어 들여다보았다.

“저는 이게 좋아요.”

그러더니 모란 그림을 집어 들었다. 탐스럽게 핀 모란 위로 나비 두 마리가 교차하듯 날고 있는 그림이었다.

“나비가 너무 예쁘지 않아요? 언니, 이것도 같이 사요.”

염온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과찬이십니다. 아가씨들께서 좋게 봐주시니 황송할 따름입니다.”

큰아가씨가 여전히 그림을 이리저리 기울이며 말했다.

“아니,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요즘 이런 솜씨를 만나기가 쉽지 않은데.”

작은아가씨는 모란 그림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연꽃 그림을 또 집어 들었다. 잠시 들여다보다가 내려놓았다.

“이건 좀 수수한 것 같아요.”

“수수하다고? 얘, 이건 단아한 것이지.”

“단아한 게 아니라 그냥 심심한 거예요. 언니는 저런 게 좋아요?”

“그래.”

“……역시 취향이 촌스러우셔.”

큰아가씨가 어이없다는 듯 작은아가씨를 흘겨보았다.

“네가 요란한 거지, 내가 촌스러운 게 아니야.”

작은아가씨가 입을 삐죽거렸다가, 이내 픽 웃으며 언니를 쳐다보았다.

“언니는 그렇게 뭐든 소박한 게 좋다니까, 시골에 내려가셔도 잘 지내시겠다.”

웃음기 섞인 빈정거림이었다. 큰아가씨는 그림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코웃음을 쳤다.

염온은 두 사람을 바라보며 조용히 웃었다.

촛불이 흔들릴 때마다 아가씨들의 얼굴 위로 빛과 그늘이 번갈아 지나갔다.

염온은 손 위의 비단을 고르는 척하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르신께서 자리를 옮기시게 되셨나요? 심려가 크신 것 같아서요.”

큰아가씨가 그제야 그림에서 눈을 들어 염온을 보았다. 그리고 가볍게 웃었다.

“아니야. 그런 건 아닌데.”

잠깐 그림 위로 시선을 내렸다가 다시 들며 말을 이었다.

“며칠 전에 아버지께서 식사 자리에서 한탄을 하셨어. 조정 일이 너무 고되다고, 차라리 낙향이나 해버릴까 싶다고.”

그러고는 곁에 앉은 작은아가씨에게 손가락을 들어 가볍게 가리켰다.

“그런데 얘랑 남동생이 그 말에 난리가 났지. 시골은 절대 싫다고 투정을 어찌나 부렸는지.”

작은아가씨가 언니의 손가락을 탁 내렸다.

“당연히 싫죠. 그리고 언니는요? 언니는 그렇게 잘난 척하면서 다 괜찮다고만 빈말만 하셨잖아요.”

“빈말이 아니었어. 투정 부린다고 아버지 기분이 풀릴 것도 아니었잖아.”

두 사람의 목소리가 교차하는 동안, 염온은 손 위에 놓인 비단 끝을 가만히 매만졌다.

그녀의 눈이 촛불 쪽으로 천천히 옮겨 갔다.

흔들리는 불꽃을 바라보는 그 얼굴에는 웃음기가 사라져 있었다.


*


낙빈의 서재에는 등잔이 하나 밝혀 있었고, 그 빛이 닿지 않는 구석은 이미 어둠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낙리는 홀로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방 안은 조용했다. 그는 앞의 책상 위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추홍에게 전달받았던 서신이 놓여 있었다.

그때 문이 열렸다.

낙리는 천천히 일어서며 허리를 굽혔다.

“영전(榮轉)을 축하드립니다.”

“아직은 아니지.”

낙빈이 안으로 들어서며 답했다. 그는 낙리에게 가볍게 웃었다.

“편히 있어도 된다. 오래 기다렸나?”

“아닙니다.”

낙빈은 낙리의 맞은편에 앉았다. 낙리도 다시 앉았다.

낙빈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했다.

“설마 너를 보낼 줄은 몰랐는데.”

“전에 보낸 하인이 문전박대를 당했다고 하더군요. 그러니 저보고 한 번 가보라고 했습니다.”

낙리는 잠깐 사이를 두고 덧붙였다.

“댁의 분위기를 살피고 오라고 했습니다.”

낙빈은 짧게 실소를 흘렸다. 그는 책상 위의 서신을 집어 들어 천천히 펼쳤다.

“문전박대라…….”

그가 나직이 읊조렸다.

“대문 안으로는 들였고, 심부름 값도 챙겨주었는데…….”

서신을 읽는 속도가 느렸다.

“조회가 끝나고 승상이 와서 따로 이야기를 하자기에, 조정의 일은 조정에서 다하였는데 사적으로 나눌 이야기가 무엇이 있겠느냐고 정중하게 말했을 뿐이야. 그것이 기분이 상할 일이었나.”

그는 편지를 천천히 접었다.

“네 체면은 살려주어야 하니 답장은 써주마.”

방 안이 조용해졌다. 낙빈은 접은 편지를 손 안에서 가만히 두드리다가 눈을 들어 낙리를 보았다. 이번에는 웃음기가 없었다.

“혹시……. 최근에 스승님을 뵈었느냐?”

낙리가 미미하게 굳었다가 풀렸다.

“……승상가 내의 일을 보고하고자 얼마 전에 뵈었습니다. 길게 대화를 하지는 못했습니다만.”

그는 일순 무릎 위를 내려다보았다가 시선을 들며 말을 이었다.

“그분께서는 별 말씀 없으셨습니다.”

낙빈은 그 말을 듣고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낙리를 바라보던 시선이 등불 언저리로 내려갔다.

이윽고 그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인사는…….”

그가 천천히 말했다.

“사전에 스승님과 의논된 것이 아니다.”

낙리의 눈이 살짝 움직였다.

“그렇습니까.”

“황상께오서 나를 독대(獨對)하여 알려주셨지. 그리고 스승님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다.”

낙빈은 손 안의 편지를 내려놓았다.

“스승님께서 나를 도와주시기는 하셨어. 하지만 이번 일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는……알 수가 없다. 그게 불안해.”

“……저는 들은 것이 없습니다만.”

낙리는 나직한 어조로 덧붙였다.

“태사께서 사제간의 일을 저에게 이야기하실 리는 없을 듯합니다.”

낙빈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까…….”

그는 다시 등불을 바라보았다.

“황상께서 이번 인사를 통해 구상하고 계신 것이 있어. 스승님과 의논하고 싶지만, 지금 분위기로는 함부로 만날 수도 없고…….”

그는 짧게 웃었다. 자조에 가까운 웃음이었다.

“나도 아직 미숙한 모양이야.”

낙리는 그 말에 답하지 않았다. 무릎 위에 얹은 손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가 멈췄다.

밖에서 바람 소리가 들렸다. 처마를 스치고 지나가는 소리였다. 겨울이 한걸음 다가오고 있었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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