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병처럼 톡 터트리며 꽃을 피우다

2-1새끼노루귀.JPG 새끼노루귀

"새끼노루귀가 피었네.”

바람이 노래하며 숲을 흔든다. 그러나 정작 노루귀가 피어 있는 숲으로 가는 길은 무서운 바람이 휘몰아쳐 음산하기만 하다. 겨울 숲에서 들려오는 바람의 소리는 끝없이 부서지는 파도처럼 가슴을 적시기도 하고, 때로는 거센 비처럼 스며들어 스산한 여운을 남긴다. 특히 목장 길을 스쳐가는 바람은 한층 더 싸늘하다.


바람은 울부짖고, 나목들은 그 바람에 맞서며 쉼 없이 수군거린다. 그 속으로 조심스레 발을 들인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포근한 숲으로 들어서자 바람은 등을 토닥이며 스스로를 달래기 시작한다. 바람도 이곳에서는 울음을 멈추고, 숲 속에는 정적만이 흐른다. 그 고요함 속에서 꼼지락거리며 살며시 얼굴을 내미는 작은 봄꽃들이 하나둘 눈에 띄기 시작한다.


언 땅을 뚫고 솟아오른 새끼노루귀들이 참 기특하다. 한 줄기 햇살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뽀송뽀송한 솜털을 말리고 있다. 마치 막 태어난 아기 노루가 부드러운 햇살을 온몸으로 감싸는 듯하다.

“바람이 아직도 싸늘하게 맴돌고 있구나. 발밑을 녹여 줄 햇살을 좀 더 끌어당기고 싶어.” 새끼노루귀가 속삭이듯 햇살을 향해 살며시 몸을 기울인다.


노루귀는 잎이 노루의 귀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꽃이 지고 난 후의 모습도 사랑스럽다. 귀여운 아기 노루의 부드러운 귀처럼, 꽃이 진 자리에는 포근한 잎이 돋아난다. 노루귀는 아이들에게 꼭 보여주고 싶은 꽃이다. 연약한 힘으로 언 땅을 밀어내며 일어서는 생명의 경이로움, 부족한 모습도 아름답게 빛낼 수 있는 당당함을 가진 꽃.


하지만 이렇게 깜찍하고 귀여운 노루귀에게도 남모를 슬픔이 있다. 그 슬픔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너무 깊이 감추었기에 어디에 슬픔이 있는지조차 알 수 없다. 노루귀는 마치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본다. 우리도 사랑스러운 마음으로 노루귀를 바라볼 수 있을까?


그러나 슬프게도, 노루귀에게는 꽃잎이 없다. 꽃잎은 퇴화하여 꽃받침으로 변했다. 그래서 우리가 꽃잎이라 생각했던 것은 사실 꽃받침이다. 꽃받침은 6장에서 많게는 9장까지 있으며, 꽃잎보다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우리 앞에 선다.


그 꽃받침의 색은 참으로 다양하다. 겨울날 설렘처럼 다가오는 눈처럼 맑은 흰빛, 복사꽃처럼 따스한 연분홍빛, 여름바다처럼 시원한 푸른빛, 책갈피에 간직하고 싶은 단풍잎처럼 고운 노란빛. 노루귀는 그 작은 몸에 수많은 계절을 담아낸다.


꽃받침을 감싸고 있는 세 개의 총포에는 포근한 흰털이 빽빽이 나 있다. 꽃술도 제각기 다른 빛깔을 품고 있다. 눈처럼 순백인 것도 있고, 봄의 꿈처럼 연한 분홍빛을 띠기도 한다. 꽃잎이 없는 슬픈 꽃, 노루귀. 그러나 노루귀는 결코 슬픔에 울지 않는다. 자신의 모자람을 더욱 아름다운 빛깔로 채워가며, 우리 가슴속에 열병처럼 톡 터트리며 봄의 노래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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