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짓으로 건넨 말, 마음으로 남다

가끔은 말보다 더 진한 울림을 주는 만남이 있다. 소리 없는 손짓, 조심스러운 눈빛, 망설이던 고갯짓.

그 속에 담긴 용기와 진심이 마음 깊이 남는다. 그녀와의 인연도 그랬다. 말 한마디 없이 마음을 전하던 소녀.

그 아이는 어느 날 아주 작고 조용한 “네”라는 목소리로 나를 놀라게 했다. 그리고 나는 그 한마디에 오래도록 머물게 되었다.


자유학기제 수업이 한창이던 어느 날, 캘리그래피 수업에서 유독 조용한 청소년이 눈에 들어왔다. 또래에 비해 작고 왜소했던 그녀는 예쁘고 단정했으며, 수업 시간 내내 침묵 속에서 묵묵히 붓을 움직였다.


그녀는 말 대신 손짓으로 내게 말을 걸었다. 간단한 의사표현은 손바닥에 글씨를 써서 전하기도 했다. 처음엔 낯설었지만, 우리는 손짓과 눈짓으로 조금씩 대화를 이어갔다. 수업이 끝날 즈음이면 그녀는 늘 눈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건넸고, 나도 모르게 그녀를 기다리게 되었다.


어느 날, 용기를 내어 물었다.

“혹시 수련관에 한 번 와볼래?”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말이면 나는 수련관 문을 바라보며 그녀가 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녀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아니, 조심스러웠던 것 같다. 새로운 공간을 넘는 일이 그녀에게는 생각보다 큰 용기가 필요했으리라.


그렇게 자유학기제가 끝나고, 졸업을 앞둔 행사에서 다시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나는 “그동안 기다렸어. 언제든 잠깐이라도 들러줘.”라고 조심스레 말을 건넸고, 그녀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침내, 겨울방학 무렵 그녀가 친구와 함께 수련관에 왔다. 우리는 따뜻한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그날, 그녀가 처음으로 말문을 열었다.

“말할 수 있어?”

놀라며 물은 내 질문에, 그녀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함께 온 친구가 그녀의 사연을 들려줬다. 초등학교 1학년 시절, 발표를 강요했던 담임 선생님 때문에 마음을 닫게 되었다는 이야기. 부모와 떨어져 천사의 집에서 생활하고 있던 그녀는 차츰차츰 말을 잃어갔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듣는 동안 마음이 아렸다. 얼마나 외로웠을까. 얼마나 불안했을까. 다행스럽게도 천사의 집에서는 그녀를 따뜻하게 보살펴주는 어른이 있었다. 그녀는 그 선생님을 부모처럼 의지하고 있었다.


그날 이후 우리는 조금씩, 천천히 더 많은 대화를 나눴다. 그녀는 자신의 삶과 생각을 조심스레 말했다.


그녀는 이제 성인이 되었다. 천사의 집을 나와, 새로운 세상 속에서 스스로 적응하며 한 걸음씩 성장하고 있으리라 믿는다. 나는 가끔, 손짓으로 시작된 우리의 대화를 떠올린다. 말없이도 마음을 전했던 그 시간들. 그리고 어느 겨울날, 아주 작고 떨리는 목소리로 들려준 “네”라는 한 마디. 그 한 마디는 지금도 내 마음 한편에서 조용히 울리고 있다.


그리고 나는 바란다. 어둠이 있더라도, 그 속을 딛고 빛나는 내일로 달릴 수 있는 사람으로, 그녀가 단단하게 성장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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