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때부터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 오던 친구들이 있다. 지금까지도 단체메시지를 통해 가끔씩 연락을 주고받는다. 학생으로 만났던 친구들이 어느덧 결혼을 하고 아이 엄마가 된 친구들도 있었다. 그렇지만 아직 미혼인 친구가 있고, 결혼했지만 아이가 없는 친구가 있어 공감대 형성이 퍽 난감한 편이다. 그럼에도 서로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공감해 주려고 각자 무던히 노력을 하는 모습이 때때로 눈에 보인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작스럽게 불행 배틀이 시작되었다.
"야, 애들 진짜 많이 컸다. 남의 애는 빨리 큰다더니만. 정말이네"
내가 쌍둥이를 키우는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프로필 사진 속에 친구의 두 아이가 부쩍 성장한 모습으로 활기차게 웃고 있는 모습을 보고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그렇지~. 복덩이도 많이 컸네. 몇 개월이더라?"
친구가 내 프로필 사진 속 아이 모습을 보고 화답을 해주었다.
"이제 24개월. 요즘 너무 떼쓰고 칭얼대서 힘들어 죽겠다."
"나는 암만해도 복덩이는 순한 것 같은데..."
괜한 하소연을 한 것일까. 친구가 내 속을 긁어버렸다.
"00이 결혼식 때 말이야. 되게 순했어."
내 친구는 도대체 무엇을 기억하는 것일까.
올해 결혼한 친구의 결혼식에서 모두 다 같이 만난 적이 있었다. 나는 남편이 바쁜 탓에 아이와 단 둘이 갔었다. 하필 조용하게 예배식으로 진행하는 성당 결혼식이었다. 나는 식이 시작되자마자 칭얼대기 시작하는 아이를 구석에 데리고 가서 같이 쭈그려 앉았다. 가방에서 장난감을 챙겨줘도 절레절레하며며 싫다고 했고, 종류별로 간식을 줘도 마다했다. 시간 때를 보아하니 배가 고픈 것 같아 맘마 줄까? 물어보니 끄덕였다.
아뿔싸, 여기서 도시락을 꺼내야 한다니... 하지만 별 다른 수가 없었다. 곧 있으면 내가 결혼식 축가를 불러야 했기에 나는 밖으로 나갈 수 조차 없었다. 미리 챙겨 온 보온 도시락 통과 숟가락을 꺼내 아이에게 밥을 먹이기 시작했다. 아이는 신나서 소리 지르기 시작했고, 나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아이를 진정시키고 있었다. 밥을 다 먹이고도 예배가 끝나지 않아 아이가 지루해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렇게 예배가 끝날 때까지 흐르는 땀을 닦으며 아이를 안고 달래주기 바빴다.
이런 상황을 옆에서 지켜보고도 아이가 순하다고 말하는 친구는 어떤 일상을 보내는 것일까.
쌍둥이라서 짐작이 가지 않기는 하지만, 남의 육아에 함부로 입대는 것이 아니라고 배웠으므로 조용히 꾹 다물고 있었다. 하지만, 내 속을 끓는 상황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맞아. 너는 쟤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야."
결혼은 했지만 아이가 없는 친구가 던진 한마디에 울컥했다.
"직접 키워보면 알아. 이 세상에 순한 아기는 없어."
나는 화가 나서 한마디 쏘아붙였다.
억울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아이가 낯을 가리지 않아서 돌 전에는 편했지만, 돌 이후로는 단 한번 외식을 한 적이 없었다. 너무 낯을 가리지 않는 탓에 어디를 가든 간에 하고 싶은 행동을 했고, 곧바로 떼를 썼기 때문이다. 외식을 못하니 여행도 가지 못했다. 어른 둘이어도 아이 하나를 전혀 감당해내지 못했다. 동네 마트에서 조차 카트를 밀게 하지 못하게 해서 세상 떠나가라 우는 탓에 큰맘 먹고 가야 했다.
물론, 쌍둥이를 키우는 것이 더 힘들 수도 있지만, 내 친구의 상황은 적어도 나보다 나은 점이 많았다. 양가 부모님이 적극적으로 육아를 도와주고 남편의 일정한 출퇴근 시간과 주말에 쉬는 환경과는 다르게, 나는 양가 부모님이 도움 없이 주 7일 일하고 지방출장이 잦은 남편으로 인해 평일 주말 할 것 없이 혼자 애를 돌보기 때문이다.
아이가 없는 친구의 환경 또한 마찬가지이다. 바로 윗집에 친정부모님이 살고 있고, 매일 윗집으로 올라가 삼시세끼 얻어먹으며 팔자 좋게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 친구의 조카를 돌봐주시는 것을 보면, 아마 그 친구가 아이를 낳아도 부모님이 다 키워주실 것이다.
답답한 기분이 들었고 울화가 치밀어 단체메시지 어플을 꺼버렸다. 나는 친정이 없고, 시댁은 멀고, 남편이 시도 때도 없이 바쁜 상황을 일일이 얘기하며 나의 불행을 알아달라고 호소해야 하는 꼴이라니. 나는 홧김에 단체메시지 창에 사진을 하나 띄웠다. 그 사진은 내 아이가 쇼핑몰의 바닥에 주저앉아서 신발을 벗고 드러누워있는 모습이었다.
"이게 순한 아이니? 매일 이렇게 떼를 써."
그냥 보내지 말 걸 그랬다. 쌍둥이를 키우는 친구가 이어서 사진을 보냈다. 쌍둥이 중 한 명이 엄마의 머리를 잡아채고 있는 모습이었다. 단체메시지 창은 웃음으로 가득했다. 나는 이골이 나서 창을 닫아버렸다. 여유가 없는 내게 반복되는 이 상황은 짜증만 날 뿐이었다. 알아주지 않아도 되니 괄시만 말았으면 했다.
그렇게 연애 얘기만 가득하던 단체메시지창은 어느덧 결혼, 임신, 육아 얘기로 가득 차버렸다. 여유가 점점 사라지고 서로의 힘든 얘기만 하게 되었다. 나의 속사정을 모두 알 것이라는 착각과는 다르게 대화가 흘러갔고, 각자가 속한 환경에서만 살아가기 바쁜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나는 반복된 이런 상황이 익숙했지만 속상한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럴 때마다 남편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뭘 이런 일에 화를 내. 어차피 당신 상황을 다 얘기해도 친구들은 절대 이해 못 해."
맞는 말이다. 내 불행을 다 얘기한들, 겉으로만 이해하는 척을 할 테고, 속으로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나의 상황을 이미 알면서도 늘 저렇게 대화가 흘러가니 말이다. 불행을 인정받으려는 나의 뒤틀린 욕구를 사그러뜨리는게 맞다. 그들이 내 불행을 알아준다고 한들 내 상황은 나아지지 않는다. 내 기분만 나아질 뿐.
부정적인 감정이 격해지면 인간관계까지 뒤틀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릇된 인정욕구는 무서운 존재였다. 나 스스로의 상태를 내가 인지해야 한다.
'내가 지금 많이 힘들구나. 그래서 고된 육아도 잘 해내고 있다고 남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거였어.'
내 마음을 다독여 줄 수 있는 존재는 내가 유일하다.
무의미한 불행배틀은 이제 그만하자.